▲동학굿이 열리는 속리 초등학교. 가운데 제단을 중심으로 여러 격문과 만장이 나부끼고 있다.전희식
이가 빠지고 땟국이 줄줄 흐르는 실상사 도법스님의 다기 한 세트가 40만원 정도에 거래되어 보은군 내 농가빚에 시달리는 농민에게 전해지는 식이었다. 한 문화운동가가 평생 사용하던 낡은 장구가 새 것보다 몇 배 비싸게 거래되었다. 역시 농민의 희망의 불씨로 건네졌다.
이곳 보은취회에서 통용되었던 '보은화폐'를 두고 좌계 선생은 나에게 사이버머니와의 결합을 연구해달라고 했다. 불환폐인 지폐의 위조를 막기 위해 드는 비용을 사이버머니와의 결합으로 해결하자는 취지였다.
아름다운 사람들 - 살아있는 부처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이 세 번째로 걷기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들 묵묵히 그냥 걷고 있을 뿐이다. 하늘빛님은 여전히 새벽에 사람들이 일어나면 조용히 새날의 기운을 잘 받아들이도록 몸을 마디마디 풀어준다. 다리 털기, 발목 돌리기, 허리 꼬기, 머리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장 마사지, 척추 펴기 등등. 서림스님은 간단한 명상을 지도하신다.
수정씨는 예나 지금이나 꼭두새벽에 일어나 신 김치에 풋고추로 아침 식탁을 준비한다. 정경식 걷기위원장은 항상 조용히 독서를 하거나 잠을 잔다. 먼 길 걷는 사람은 눈길 하나도 아껴 내공을 쌓아야 하리라.
내 눈에는 이들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비에 흠뻑 젖어 당도한 속리 초등학교에서 열린 호혜시장에 허름한 보따리를 든 해월 선생이 보였다. 흐트러진 상투를 미처 만지지 못한 전봉준도 작은 체구와 단단히 다져진 몸매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한다. 눈빛 형형한 김개남도 호주머니를 연다. 가장 용맹했던 천민부대인 김개남 부대.
김개남 장군은 긴 칼을 거머쥐고는 어느새 사람들이 잔을 올리고 있는 제단으로 나가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충주 기천문 도장에서 온 검무사가 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깃발이 오르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를 부른다. 검은 도복의 검무사는 최제우가 한풀이로 추었다는 기천무라는 칼춤을 춘다. 바람을 가르며 왜군의 총탄처럼 내리꽂히는 빗줄기를 잘라낸다.
그날의 영령들의 서러움이 세찬 빗줄기와 칼춤을 통해 나에게 다가온다. 제단의 대나무 깃발은 휘청거리면서도 탄력있게 다시 일어선다.
갑오년의 죽창을 든 접주들이 백두에서 한라까지 달려갈 사발통문에 이름 석자를 적어 넣는다. 임오년(2002년) 동학군의 칼춤이 시작되자 장안으로 태풍이 날아들고, 그 거센 바람결에 휘말린 사발통문이 천지사방으로 새처럼 날아가 남과 북 모든 접들의 기포를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