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無冠)의 영예 - 일제하 작가들

등록 2002.10.09 12:34수정 2002.10.09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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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말엽에 <조광>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한자로 <朝光>이라고 쓰니 아침빛이지만 조선의 빛이라는 뜻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그 뜻이 음미할 만하다.

얼마 전 비평가이자 시인이었던 임화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려고 그 잡지를 뒤적이다가 흥미로운 설문 설답을 발견했다.


1940년 9월호 엽서회답(葉書回答)이라는 코너에 <朝鮮文學賞을 준다면?>이라는 설문을 던져 한설야, 유진오, 이효석, 김남천, 김사량, 정비석, 이원조, 채만식, 김동리, 엄흥섭 등 당대 활약이 두드러졌던 문학인들의 답변을 수록해 놓았던 것이다.

수상자 물망에 올랐던 문학인은 임화,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이태준, 이기영 등인데 그런대로 다수의 지목을 받고 있는 사람은 이광수였다. 그는 당대 작가들에게 넘어서야 할 거대한 벽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이 가운데 비평적 공적을 들어 임화가 지목되기도 한 것은 하나의 이채였다.

상금 액수는 얼마나 되어야 하겠느냐는 물음에는 이구동성 격으로 1천원이란다. 1천원이면 지금 식으로 따져 얼마나 되느냐?

채만식이 1940년 무렵에 당시 한촌에 불과했던 경기도 안양 안양천 뚝방 위에 지어진 담장도 없는 알몸뚱아리 집을 사려고 형한테 돈을 꾸고 인세를 당기고 전세를 끼고 하는 몸부림을 쳤는데 그렇게 해서 마련한 집값이 270원.

그렇다면 당시 돈 1천원은 집 한 채 값의 세 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집이라는 것이 지금으로 따지면 어느 개발 요원한 면 단위 시골에 버려져 있음직한 누옥임을 생각하면 요새 돈으로 쳐서 1천만원이나 될까? 그 사이에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것까지 감안해서 말이다. 채만식이 산 그 집은 그해 여름에 홍수에 쓸려나가 아주 못 살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었다.


달리 생각해서, 그때 <조광> 잡지가 40전이었으니, 1000권 400원, 2000권이면 800원, 3000천권이면 1200원이다. 요새 잡지가 대개 10000원 안팎이니 그게 3000권이면 겨우 3백만원? 또 1942년에 나온 한설야의 장편소설 <탑>의 가격은 1원 50전이었으므로 두 권이면 3원, 20권이면 30원, 200권이면 300원, 600권이면 900원이라 …, 요즘 소설책 한 권에 1만 원쯤 하니 600권이면 6백만원인가? 경제학도가 못 되는 사람의 셈법이란 이렇게 너저분하다.

아무튼 집으로 환산하면 1천만원쯤 되는데 책으로 따지면 약 6백만원쯤 되는 상금을, 신춘문예를 제외하면 유사이래 최초일 수밖에 없는 문학상의 상금으로 작가들은 제시했던 것인데, 그러면 그 조선문학상이라는 것이 생겨났던가, 하면 그렇지 못했다.


당시의 작가들에게 조선의 이름으로 상을 받을 수 있는 행복한 여건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렇다 할 시상 제도 하나 없는 척박한 풍토에서 '조선문학'의 길을 개척했고 그들이 뿌린 씨가 오늘 이렇게 숱한 열매로 다닥다닥 열렸다. 그들은 무관(無冠)의 문장가들이되 진정한 실험가들이었다.

오늘날은 문학상이 많고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상이 존재하기에 상 받을 작가를 쥐어 짜내고 그것을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문학 메카니즘이다. 상이 많다는 것이 결핍을 그렇게 보상받으려는 욕망의 소산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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