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편집인의 무책임한 글쓰기

그가 말하는 '반미정서'와 '반미주의'의 속내

등록 2002.10.26 17:20수정 2002.10.31 11:41
0
원고료로 응원
안녕하십니까? 저는 미국에서 언론학 박사과정을 밟고있는 강인규입니다. 얼마 전 <시사저널>에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편집인께서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으로 뽑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미 여러 해에 걸쳐 이 영예를 누리신데다가, 뒤늦게 인사를 드린다는 사실이 쑥스럽기는 하지만 멀리서나마 축하의 말씀 전합니다.

조선일보 김대중 편집인
조선일보 김대중 편집인오마이뉴스 권우성
비록 한국땅을 떠나 있지만, 언론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니만큼 <조선일보>가 현대 한국사회에서 긍정적인 의미로든 아니면 부정적인 의미로든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논란의 성격을 떠나, 언론인으로서 한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여론을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것을 언론의 사명이라고 할 때,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모든 언론종사자들이 소망하는 꿈이 아닐까 합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으로 꼽히는 것보다 큰 명예가 없지만, 그 언론인이 속한 사회나 그 언론인을 가진 국민의 입장은 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영향력"이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니느냐'가 아니라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일 것입니다. 결국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이란 그 영예의 기쁨에 못지 않은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영향력 1위의 언론인"은 그가 속한 사회의 재앙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는 과학기술의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어느 곳보다 개방적이고 관대한 사회지만, 대중매체에 관한 한 놀라우리만큼 강한 문자/인쇄문화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이 방송사가 아닌 신문사 소속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조선> <중앙> <동아>의 세 신문이 영향력 면에서 공중파방송인 에스비에스(SBS)를 앞서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문자중심적 특수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신문의 발행부수와 시장점유율입니다.

제가 지내고 있는 곳이 미국이고 <조선일보> 역시 미국의 언론상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곳의 사례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의 인구는 한국인구의 여섯 배가 넘습니다. 따라서 한국보다 거대한 언론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조선일보>가 200만부 이상을 발행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반면에 여섯 배가 넘는 시장을 가진 미국에서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는 각기 100만부를 겨우 찍을 뿐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대중지는 <유에스에이 투데이>인데, 이것의 발행부수도 170만부를 넘지 못합니다.

미국의 신문 발행부수가 한국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이유는 그 신문들이 장사를 못하거나 기사의 질이 떨어져서라기보다는, 미세하게 분할되어있는 일간지 시장의 특성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에는 1500개 이상의 일간지가 서로 경합하고 있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의 신문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도 규모가 큰 지역신문의 하나일 뿐입니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는 '중앙지'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언론사의 탈세와 소유구조가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많은 신문사들이 미국의 사례를 들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에서는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없으며, 신문사가 사주소유인 경우도 허다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미국에서는 언론사가 탈세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대상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세무조사를 하지만, 탈세가 드러나는 경우 그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언론사의 소유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사주제를 고수하고 있는 곳은 있지만, <조선> <중앙> <동아>처럼 독과점적 시장지배력을 행사하는 언론사는 없습니다. 하나의 신문이 사회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주 개인에 의한 여론의 지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한국은 <조선> <중앙> <동아>라는 세 개의 신문이 총 500만부 이상을 발행하면서 시장의 70퍼센트 이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미국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벌써 정부의 개입이 시작되었을 겁니다. 소수의 언론이 시장을 지배하는 것보다 위험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미국을 자유방임주의의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매체는 방송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영향력이나 광고시장의 규모에서 신문은 방송의 적수가 되질 못합니다. 마땅히 미국의 방송은 그 영향력으로 인해 신문과는 달리 정부의 엄격한 규제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미국에서는 하나의 언론이 시장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의 방송사가 전체 가구의 35퍼센트 이상을 시청자로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주시청 시간대의 첫 한 시간은 예외없이 지역방송에 할애되어야 하고, 모든 케이블 방송사는 시청자들이 참여하는 커뮤니티 채널을 의무적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저는 언론의 독점이야말로 민주화의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민주화된 사회치고 한두 개의 언론이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곳은 없습니다. <조선일보>가 전에 사용하던 "우리가 쓰면 여론이 됩니다"라는 광고문구를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사회여론이 하나의 언론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자랑하는 이 거만하고 섬뜩한 주장이야말로 민주사회와 가장 멀리 있는 발상일 것입니다. 한 줌의 언론에 의해 국민의 생각이 중앙통제되는 끔찍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상업주의에 물든 언론사를 제외하고는.

저는 앞의 <시사저널> 여론조사를 보고, 김대중 편집인께서 <조선일보>에 지난 이 년간 연재한 칼럼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김대중 편집인의 글은 거의 예외 없이 '북한-미국-현정부'라는 삼각구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남북 정상회담, 부시정권과 "악의 축" 발언과 북-미관계의 대립, 이산가족방문과 북-미관계 회복, 북한의 핵개발로 인한 갈등 등 여러가지 상황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편집인이 미국과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김대중 편집인의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혐오, 북한에 대한 불신, 그리고 (호감에 의한 것이든 실제적 필요에 의한 것이든) 부시정부에 대한 적극적 지지. 이중에서 그나마 미세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던 부분은 미국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수사학 정도입니다. 김대중 편집인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9.11사태 이후 국제질서가 재편되면서 한국은 나라의 장래를 가름하는 중대한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우리는 이른바 「문명권과 이에 도전하는 질서, 둘 중에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 미국의 이런 자세가 옳으냐 그르냐의 가치판단 문제는 별개로 이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며 우리처럼 미국과의 관계를 중대한 변수로 지니고 있는 나라는 가타부타 이전에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 김 대통령은 이런 와중에 이제 미국 시장을 넘어 유럽으로 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공언하고 있다. 『한국에 아프간 파병을 요청했을 때 이리저리 꽁무니를 빼더니 막판에 겨우 지원병력을 보낸다고 생색을 내지를 않나. 미군 주둔지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오래전에 요청했는데도 뒤늦게 이제와서 건립반대 데모를 동원하질 않나- 하느니 미국 신경 건드리는 일만 골라서 한다』는 것이 전직 한 외교관의 솔직한 걱정이다." - <김대중칼럼> "한국, 어느쪽에 설 것인가?" 2001. 12. 28.

"미국은 그것에 동의하든 아니든 김 대통령이 여기까지 끌고 온 「햇볕」의 발자국을 애써 지우려고 할 필요가 없다. 전략적으로 보더라도 부시는 다음 한국대통령과 새로운 조율을 하면 된다. 김 대통령으로서도 이제까지 자신이 찍어놓은 발자국을 실물 이상으로 확대시키려고 다투지 말고, 정축이 아닌 운동방식의 외교를 동원하지 말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문제 때문에,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한 발언 때문에 한•미관계에 어떤 금이 생긴다면 50년 전통이 어이없다." - <김대중 칼럼> "北 때문에 韓ㆍ美가 싸운다?" 2002. 2. 8



관련
기사
- <조선> 김대중의 후천성 반미결핍증

첫번째 글은 미국의 입장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무의미하며, "가타부타 이전에" 미국쪽에 줄을 서야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이왕이면 "꽁무니를 빼"지말고 '화끈하게' 선수를 쳐서 미국의 호감을 얻도록 노력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글은 한국의 정부보다는 미국의 정부에 조언하는 내용으로, 미국의 부시정권은 김대중을 상대하려고 애쓸 것 없이 다음 정권을 기다리라는 조언과 더불어, 한국의 우선순위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목할 부분은, 앞의 두 글 모두가 한국의 반미운동이 현 정권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김대중 편집인의 최근 글 가운에 일부입니다.

"반미(反美)에는 대체로 두 개의 범주가 있다. 하나는 반미정서 또는 반미감정(anti-American sentiment)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미주의(反美主義 • anti-Americanism)다. 반미정서는 미국의 어떤 부분을 마땅치 않게 여기거나 싫어하는 소극적인 감정이고 반미주의는 미국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고 공격적으로 반대하는 신념이라고 볼 수 있다. […] 근자에 와서 한국 또는 한국민의 대미관(對美觀)은 심상치 않은 변화를 겪고 있다. 미국에 대한 비판적 견해라고 해야 반미정서의 차원을 넘지 않았던 대미관이 부분적으로 점차 경계선을 넘어 반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햇볕'을 가리려는 부시와 미국의 '구름'을 싫어하는 나머지, 한국 내의 '반미'에 어쩌면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반미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도 않고 주변의 권고로 마지못한 듯 몇 마디 해도 어쩐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 <김대중 칼럼> "反美정서와 反美主義" 2002. 10. 21.

이 글에 따르면 '반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반미정서'라는 '소극적인' 배척이고, 다른 하나는 '반미주의'라는 '적극적인' 혐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미정서'는 미국의 태도에서 비롯된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는 반면, '반미주의'는 그렇지 못한 비이성적 태도로서, 현재 한국인의 '반미정서'가 이제는 위험수위를 넘어 '반미주의'로 이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현 정권의 책임이라는 것이 이 글에 담긴 주장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제가 느낀 점은, 이제 <조선일보>마저 한국인의 반미정서를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언론이 한국국민의 대외정서를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우습기는 하지만, 한국정부보다 미국정부에 더 우호적이고, 반미운동에 대해 미국의 언론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해 온 것이 <조선일보>였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용"은 미국에 대한 <조선일보>의 태도변화 때문이 아니라, 마케팅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조선일보>를 사주는 사람은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김대중 편집인이 채택한 전략은 '(국민에 의한) 소극적인 반미"와 "(정부의 사주에 의한) 적극적인 반미'를 구분해서 하나는 면죄부를 주고, 하나는 적극적으로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 전략은 지배적 입장이 된 독자들의 대미인식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현정부를 공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전략을 위해 채택된 '반미정서'와 '반미주의'의 구분은 김대중 편집인의 자의적인 개념조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김대중 편집인은 영어로 주석까지 달아가며 열심히 그 차이를 구분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반미정서'와 '반미주의'의 차이는 그 혐오의 강도나 적극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미주의(Anti-Americanism)'란 '반미운동'과 '반미정서' '반미성향' 등에 반영된 특성을 추상화한 개념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운동'이나 '정서'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반미주의'를 보셨습니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텝스(TEPS)'라는 영어시험까지 상품화한 언론의 편집인치고는 형편없는 영어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향력있는 언론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무책임한 글쓰기의 예는 다른 곳에서도 드러납니다. 앞에서 인용한 글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하지요.

"'한국에 아프간 파병을 요청했을 때 이리저리 꽁무니를 빼더니 막판에 겨우 지원병력을 보낸다고 생색을 내지를 않나. 미군 주둔지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오래전에 요청했는데도 뒤늦게 이제와서 건립반대 데모를 동원하질 않나- 하느니 미국 신경 건드리는 일만 골라서 한다’는 것이 전직 한 외교관의 솔직한 걱정이다." - <김대중칼럼> "한국, 어느쪽에 설 것인가?" 2001. 12. 28.

"한국의 반미만이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한국기피'도 심상치 않다. 미 국방부와 접촉이 있는 한 한국 예비역장성은 '근자에 와서 한국으로 전근발령을 받은 미군 장교들이 전역을 신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전하면서 한국은 미군이 가장 싫어하는 근무지가 됐다고 했다. "최근 미군병사와 서경원씨 사건과 이에 대한 한국언론의 보도로 주한미군이 주재국에 대해 이렇게 분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 <김대중 칼럼> "反美정서와 反美主義" 2002. 10. 21.


앞의 두 인용문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모두 '복화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김대중 편집인의 글에서 각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직접 인용문의 주인은 '전직 한 외교관'과 '미 국방부와 접촉이 있는 한 한국 예비역장성' 그리고 '관계자'입니다. 그러고 보면 김대중 편집인께서는 발이 대단히 넓으신 듯합니다. 이렇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대신해서 적재적소에 해줄 정보원이 주위에 널려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이런 인용법을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시지요.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저널리즘의 예인지를 잘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한국 및 미국정부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한 미국 언론인은 '<조선일보>야말로 한국 민주화의 걸림돌'이라는 입장을 전해왔다."

김대중 편집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그 '현실'은 한국에 더 절실하다는 것을 한국인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가정치고 한집 건너 미국과 관련이 없는 집이 없다. 미국에는 150만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투자를 빼가면 한국경제가 큰 파탄을 겪게 돼 있다. 안보문제에 있어 주한미군의 존재는 동북아의 견제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에 있어 미국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현실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한국 가정치고 미국과 관련이 없는 집이 없지요. 하지만 북한은 우리나라의 가정과 별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지요? 최근들어 "전쟁도 불사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조선일보>의 호전적 태도를 보면서 <조선일보>의 무비판적 대미인식이 국가이익을 위한 고육지책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반도에 전운이 돌면 제일 먼저 떠나는 것이 해외투자입니다. 북한에 폭탄이 떨어지면 무엇보다 코리아나 호텔의 투숙객부터 줄어들 겁니다.

미국이 "투자를 빼"지 않는 이유가 그들이 관대해서 손해를 봐가며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고개를 조아리며 미국을 상전으로 모셔도 얻을 것이 없는 한, 그들은 한국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우리가 미국을 일방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역시 미국에 살고 있는 '150만명의 동포' 가운데 한 명입니다. 이곳에 사는 한국인들을 배려하는 것은 '호불호'나 '가타부타'할 것 없이 미국에 비굴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에게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요구하는 합리적인 자세입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당당한 나라의 국민만이 외국에서 사람대접을 받습니다.

'할 말은 하는' 언론의 당당한 기개가 왜 미국 앞에만 서면 오그라드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4. 4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5. 5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