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대 시트위에 앉아서 본 연극

등록 2002.11.17 23:57수정 2002.11.1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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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3일, 결혼 아홉해 되던 날이었다.

"아무래도 연극제 다녀와야겠어. 아이들 저녁이나 맛있게 해줘요." 퇴근하는 길에 아내에게 전화하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장애청소년 연극제'로 향했다.

이날 연출을 하게 된 노들장애인야간학교 연극반 경민선 선생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았었다. 나도 장애 어린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장애 청소년들이 가진 어려움과 고민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아직은 유치원에 다니지만 내 딸도 청소년이 되고 또 성인 장애여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아이들도 데리고 연극을 보러 시내로 나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아내는 아이 둘을 데리고 외출하기가 부담스러웠는지 여의치 않아 혼자 가게 된 것이다. 결혼기념일, 저녁식사를 같이 못하는 미안함을 뒤로 하고...

장애청소년 연극제는 청소년 문화공동체 '품'에서 두해째 여는 것으로 지난주 내내 이어졌다. '요리조리, 비뚤빼뚤, 엉망진창, 히히헤헤' 라는 재미있고 자연스런 주제가 달린 소개자료를 받아들고 뒤편 객석에 앉았다. 객석 가득 공연을 보러온 청소년들과 어른들이 있었고, 휠체어, 전동구에 의지한 지체장애인들과 장애 청소년들도 꽤 많이 와 있었다.

노들장애인야간학교 학생들이 출연한 두 편의 연극을 보고, 같은 이름의 두 주인공 '제발이'의 고통과 희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관련 기사- 장애인도 배설하고 생리한다


지체장애 초등학생 '제발이'는 시설편의가 안되어 있는 학교 화장실 문턱을 넘을 수 없어 교실에서 오줌을 싸야했고, 결국 부모는 시설편의를 해주지 않는 학교를 그만두도록 했다.

또 다른 '제발이'는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18살의 여성이었다. 뒤늦게 찾아온 첫 생리를 겪게 되는데, 가족들은 이를 처리하는 문제와 나아가 제발이의 여성성에 대해 논란에 휩싸인다.


두 명의 '제발이'는 우리 사회 장애인 문제의 맨 처음을 다루고 있었다. 실제로 지체장애인들이 일반학교 문턱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화장실 가는 문제라고 들었다. '장애인 교육권, 이동권' 이라는 중요한 요구들도 사실 이런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두 번째의 '제발이'는 내 딸의 앞날을 미리 보여주는 듯 했다. 우리 부부도 아이가 성장하여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될 때를 생각하면 벌써 고민이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 아동청소년들의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의 생활주기를 따라서 고민을 하게 된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아이를 잘 받아줄까?
학교에 가게 되면 따돌림 당하지 않고 적응할 수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면 또 무엇을 하고 지내게 할까?
앞으로 생리를 할 나이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성인이 되고, 부모가 돌볼 수 없는 때가 되면...


그 고민이 깊고 출발부터 험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너무나도 뿌리 깊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장애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고 알 수 있는 기회 조차도 없는 게 더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른다.

이번 장애청소년 연극축제는 9개 장애청소년팀과 4개의 비장애팀이 함께 참여하였다. 장애청소년들은 힘겨운 목소리와 서툰 몸짓임에도 배우가 되어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해 주었다. 또한 비장애 청소년들도 참여하고 공감하는 자리였기에 축제의 자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들장애인야간학교팀 공연에서는 객석 소품으로 생리대로 만든 시트를 깔아 놓았었는데, 연극을 보는 동안 나는 생리대에 앉아서 내 딸이 갖게 될 '여성성'을 몸으로 느껴 보았다. 또한 장애인들이 보장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의 몸이 요구하는 대로 오줌을 누고 생리를 하는 것, 또 원하는 대로 이동하는 것, 이는 얼마나 자연스럽고 근원적인 권리들인가. 나아가 모든 장애인들의 성과 여성 장애인들의 여성성이 존중되는 세상은 과연 멀기만 한 것일까?

이날 공연장에서 편견없는 청소년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서 내 딸과 같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짐지게 될 세상이 조금은 가벼워 보였고, 또한 작은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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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부모연대 <함께웃는날> 편집위원 장애인교육권연대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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