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 속에 피어오르는 가족 사랑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32> 해장국

등록 2002.12.09 15:45수정 2002.12.0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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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배 고파?"
"아니, 아침 먹은 지 얼마 됐다고 벌써 배가 고파?"
"몰라. 내 뱃속에는 거지가 우글거리나봐."
"뭐 먹을 건데?"
"아빠도 참~ 당연히 국밥이지."


일요일 아침, 잠시 밖에 나가보니 봉림산과 비음산, 대암산, 불모산이 모두 이마에 하얀 띠를 두르고 있었다. 이곳에는 종일 비가 내렸었는데, 저 산마루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눈이 제법 많이 내렸던 모양이었다. 그때, 아침햇살에 은빛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산마루를 바라보던 두 딸들의 입에서 볼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아빠! 우리 동네에 사는 비와 눈들은 정말 이상해."
"왜?"
"겨울이 되어도 눈은 맨날 산에만 내리고, 우리 동네에는 맨날 비만 오잖아."

하긴 따뜻한 남쪽나라라고 하는 이곳 창원에도 첫눈이 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첫눈이 내린 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 하지만 말이 첫눈이었지, 그것을 보고 눈이 내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첫눈이 내린 그날은 햇살이 비치는 하늘을 떠돌던 먹장구름 하나가 창원의 하늘을 스쳐 지나가면서 잠시 여시비처럼 눈발을 약간 흩뿌린 것이 모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음산을 비롯한 인근 산마루에는 늘 눈이 내렸던 모양이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난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눈을 좋아하는 두 딸들이, 아니 서울에서 태어나 겨울이면 늘 눈을 맞으며 놀았던 두 딸들이, 산마루에만 하얗게 쌓인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입이 비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빠, 아빠는 왜 이렇게 맛있는 것만 만들어? 나는 아빠가 해주는 요리가 제일 맛있어. 국밥도 맛있고, 수제비도 맛있고, 삼겹살도..."
"엄마가 아빠보다 훨씬 요리를 잘해. 너희 엄마가 바빠서 그렇지."
"그래도 나는 아빠가 만들어주는 요리가 훨씬 맛있어. 나중에 라면 사리 많이 넣어줘어~"
"아빠, 나는 국물하고 밥 많이~"


매주 일요일 12시쯤이면 딸들의 입에서 어김없이 나오는 말들이다. 우리 집에서는 일요일 아침을 늘 10시경에 먹는다. 왜냐하면 아내는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아침 8시 30분쯤이면 어김없이 백화점으로 나갔다. 그래서 두 딸들의 식사는 모두 내가 해결해주어야 했다. 나 또한 일주일만에 찾아온 집인지라 9시 30분까지 잠을 잤다.

"아빠, 지금 물 끓이고 있어?"
"그래."
"빨랑 좀 만들어 줘? 좀 전에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단 말이야."
"짜아식들! 암만 급해도 국물이 우려나야, 지지든지 볶든지 할 거 아냐."


갑자기 냉장고 문에 불이 나기 시작한다. 두 딸들의 방에서는 연신 뽀시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빈 과자봉지가 나오고, 이번에는 감귤을 들고 들어간다. 하긴,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의 식성을 누가 탓하겠는가. 또한 날씨마저 추우니 배가 더 빨리 고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요일 점심 때만 되면 나는 국밥을 끓인다. 그래, 그냥 국밥이라고 하면 그 음식이 무언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국밥이라고 하면 워낙 종류가 많으니까. 두 딸들이 말하는 국밥은 바로 해장국이었다. 두 딸들이 그냥 국밥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두 내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드는 해장국은 세 가지다. 주로 김치를 사용하는 김치국밥과 김치와 라면을 이용하는 라면국밥, 그리고 김치와 콩나물을 이용하는 콩나물해장국밥이다. 그중 두 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라면국밥이었다.

해장국은 뭐니뭐니 해도 국물맛이 우선이다. 내가 만드는 세 가지 요리도 재료만 틀리게 들어갈 뿐, 국물(육수)을 우려내는 방법은 꼭 같다. 먼저 냄비(3인분)에 물을 3분의 2 정도 넣은 뒤, 국물멸치 10마리(큰것), 무 한토막, 다시마(명함 크기) 1토막, 매운고추 2개, 대파 1쪽(뿌리가 달린 흰 쪽)을 넣고 1시간 정도 중간불로 끓인다. 이때 사이사이에 물이 줄어들면 더 부어야 한다.

그 다음, 불을 끄고 찬물을 세 스푼 정도 넣으면 무만 뜨고 나머지 건더기는 모두 바닥에 가라앉는다. 그러면 무를 건져낸 뒤 국물을 다른 냄비에 따라내고 남은 건더기는 모두 버린다. 이렇게 하면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해장국 국물이 완성된다. 이 국물맛의 비밀은 국물이 얼마나 잘 우러났는가에 달려있다.

여기에 김치국밥은 잘 익은 김치를, 라면국밥은 잘 익은 김치 약간과 라면 반개와 스프 반을, 콩나물 해장국은 콩나물과 잘 익은 김치 약간을 넣고 끓이다가 찬밥을 넣고 보글보글 끓으면 계란 한 개를 풀어 넣으면 된다. 기본 양념으로는 송송 썬 대파, 잘 다진 마늘, 매운 고추 1개, 소고기 다시다 약간을 넣은 뒤 간을 보아가면서 집간장을 넣으면 된다.

이 해장국밥의 포인트는 뭐니뭐니해도 김치다. 김치국밥을 만들 때는 김치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쓰지만, 라면국밥과 콩나물해장국밥을 만들 때는 김치를 송송 썰어야 한다. 그리고 김치국물과 고춧가루를 약간 넣는 것도 맛의 열쇠다. 또한 모든 재료를 넣고 해장국을 끓일 때 위에 뜨는 거품을 잘 걷어내는 것도 또 하나의 비밀.

"자, 공주님들 오세요."
"나 먼저!"
"나 먼저!"
"너희 엄마는 지금쯤 뭘할까?"
"엄마도 밥 먹겠지 뭐."
"전화 한번 해 볼까?"

매주 일요일 점심나절이 되면 나는 몹시 흐뭇해진다. 그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국밥을 후후 불어가며 볼이 미어터지게 먹고 있는 두 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이 세상에서 부러운 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미안한 것은 이 즐거운 식탁에 아내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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