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 잎에 싸 온 산딸기의 담박한 맛

그리운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13) 할아버지

등록 2002.12.27 19:48수정 2002.12.2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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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자손이 귀했던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난 나는 아버님이 직장 때문에 부산으로 신접살림을 나게 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첫돌이 갓 지난 손자를 맡아 길렀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편에서 볼 때는 외아들, 며느리를 훌쩍 떠나 보낸 적적함과 아쉬움을 손자로써 달랠 수 있었고, 또 부모님 편에서는 못 다한 효도를, 어린아이를 두고 감으로써 송구한 마음을 덜 수 있다는 그런 헤아림이 때문이었나 보다.

이따금 할아버지는 산이나 들에서 돌아올 때면 산딸기나 오디를 칡 잎이나 호박잎에 싸오셔서 말없이 건네 주셨다. 요즘처럼 군것질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산딸기와 오디는 입을 즐겁게 했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부터 할아버지가 거처하던 사랑으로 건너가서 회초리를 맞으면서<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배웠다.

“군자는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평소에 인자하던 할아버지는 글을 가르칠 때만은 무척 엄하셔서 내가 글을 읽을 때 게으름을 피우거나, 한눈을 팔면 어린 손자를 당신의 목침에 올라서게 한 후 황새 다리같이 연약한 내 종아리를 회초리로 따끔하게 쳤다.


할아버지는 천문지리에 조예가 깊었다. 우리 집 마당에서는 금오산이 빤히 바라보였는데, 할아버지는 때때로 산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셨다.

a 구미공단에서 바라본 저녁놀에 물든 금오산으로 영락없이 부처님이 누워 있는 와불상이다. 예로부터 성현이나 군왕이 이 산 기슭에서 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구미공단에서 바라본 저녁놀에 물든 금오산으로 영락없이 부처님이 누워 있는 와불상이다. 예로부터 성현이나 군왕이 이 산 기슭에서 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구미시

“저 산은 예사 산이 아니다. 일찍이 신라 때 도선이 점지한 산이다. 멧부리가 보는 곳에 따라 모양새가 달라서 ‘필봉(筆峰)’ ‘귀봉(貴峰)’, 또는 ‘거인봉(巨人峰)’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와불상(臥佛像)’이라고 부르는데,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고을을 지나다가 금오산을 바라보고는 ‘군왕이 날 산’으로 예언했다.”


할아버지는 금오산 산수에 매료된 나머지 낙동강 건너 도개 마을에서 오십 리나 떨어진 구미로 옮겨와서 금오산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다 집을 마련하셨다.

때때로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사랑으로 오게 해서 금오산이 낳은 수많은 인물의 얘기를 들려주면서 선산 땅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장이라고 일러줬다.

고려 말 야은 길재 선생과 조선시대의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그리고 김숙자 김종직 같은 분의 얘기와 아울러 이중환의 <택리지>도 들려줬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선산의 옛 지명)에 있다 한다. 그런 까닭으로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았다.(朝鮮人才 半在嶺南 嶺南人才 半在一善 故舊多文士)”

a 지난해 겨울 금오산 들머리에 있는 채미정에서 필자, 고려 말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정자다. 현대사에서는 굴절됐지만 원래 내 고향 선산 구미는 학문과 충절의 고장이다.

지난해 겨울 금오산 들머리에 있는 채미정에서 필자, 고려 말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정자다. 현대사에서는 굴절됐지만 원래 내 고향 선산 구미는 학문과 충절의 고장이다. ⓒ 박도

할아버지는 무척 애주가였다. 폭주는 않고 하루에도 몇 차례 자주 드셨다. 약주를 한 잔 든 후면 사랑에서 한시나 시조를 큰 소리로 읊으셨다.

할아버지는 양풍(洋風)을 몹시 싫어하셨는데, 어머니가 그 무렵 한창 유행이던 파마를 하고서 할아버지의 꾸중이 두려워 집에서는 늘 머리에 수건을 썼다. 혼기를 앞둔 고모가 크림을 바르자 그것이 못마땅하여 어느 날 아침, 조반을 드시다가 숭늉에서 구리무 내가 난다고 밥상을 마당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6.25 한국전쟁 직후, 구미역 옆에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그 일대에 양공주들이 득시글거리자 그 꼴이 보기 싫다고 논밭에 갈 때는 일부러 먼길로 돌아다녔다. 여자와 사기 그릇은 밖으로 돌면 반드시 탈이 나거나 깨진다고 날이 저물면 여자들의 바깥 나들이는 일체 못하게 했다.

할아버지는 조상에 대한 예의, 특히 제사 의식에 엄숙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제사에 참례하기 전에는 우물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게 했는데, 어린 시절 한밤중에 세수하던 일이 큰 고역이었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거나 행하지 말라’라는 옛 어른 말씀을 따르는 분으로 동네사람들이나 집안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몹시 까다로운 분으로 여겨 피했다.

옛 것을 지키겠다고, 꺼져 가는 조선의 혼을 이어가겠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거센 양풍의 물결은 막을 수 없으셨던지 어느 날 아침, 마침내 할아버지는 내게 한학 전수를 중단하시고 당신이 손수 만든 흑판마저도 아궁이로 던져 버렸다.

그제나 이제나 부잣집 삼대 독자로 태어났다면 꽤나 호강스럽게 자랄 만도 한데 내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다. 좀 산다는 다른 집 애들은 주로 공부만 하게 했는데 할아버지는 어린 내게 온갖 잔일을 다 시켰다.

쇠죽 끓이는 일, 꼴 망태기 메고 꼴 뜯는 일, 산에나 강둑에 소치는 일, 새참 나르는 일, 모내기 때 못줄 잡는 일, 디딜방아 찧는 일, 보리나 콩 추수 때 도리깨질, 논두렁에 콩 심는 일, 산에 나무하러 가는 일 등, 농촌에서 하는 일은 거의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나는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처럼 유년, 소년 시절을 온통 보냈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 대해 불만이 많았다. 내 집보다 훨씬 못 사는 집에서도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는데, 왜 나는 가난한 집 자식 이상으로 막일을 해야 하나? 부끄러웠고 창피스러웠던 기억이 한둘이 아니다.

그 무렵, 때때로 꼴 망태기를 메고 가다가 내 또래 여자 애를 보면 창피스러워 숨곤 했다. 역전에 사는 아이들은 검정 교복에 신발도 운동화요, 머리도 하이칼라(스포츠형)인데 나는 언제나 평상복에 고무신이요, 민둥머리였다.

할아버지는 장손의 막깍기 이발료도 아끼려고 철길 건너 각산 홍씨네 무허가 이발소로 데리고 갔다. 그 집 헛간은 간이 이발소로 거적문을 올리면 맨땅바닥에 딱딱한 나무 의자만 덜렁 놓였을 뿐이다.

요즘 그 흔한 거울도 없었다. 홍 영감은 이빨 빠진 바리캉으로 내 머리를 사정없이 마구 밀었다. 그놈이 내 머리통을 전후좌우 마구 헤집고 지날 때면 따끔따끔 눈물이 주르르 쏟아 내렸다.

바리캉으로 머리 깎는 일은 잠깐이면 끝났다. 머리를 감는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머리에 남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고는 우물가로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린다. 세숫대야에다 머리를 담근 후 새까만 빨래 비누로 비누칠을 하고서 박박 문지르면 머리통이 화끈했다.

“시원하지? 쇠똥도 벗겨지니까 딴 인물이 됐다.”
할아버지는 눈두덩이 벌겋게 된 내가 안쓰러웠던지 전방으로 데려가서 눈깔사탕 한 줌을 사 주셨다. 나는 그걸 입에 한 입 물고 염소 새끼 마냥 할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무튼 나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여느 가난한 시골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다. 어쩌다 내 입에서 ‘쌍시옷’ 소리가 나오면 당장 날벼락이었다. 내 입에서 불평할 때 흔히 쓰는 ‘아이 씨’라는 말이 나올 때면 당장 회초리였다. 정히 네 심기가 언짢을 때는 ‘아이 참’ 하라고 일러 주셨다.

친지 어른이 오실 때는 꼭 큰절을 드리게 했고, 손님이 가지고 온 과자나 과일은 반드시 어른이 먹으라고 주실 때야 비로소 맛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따금 자식이 귀할수록 매질을 많이 하고 마구잡이로 키워야 한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말씀의 의미를 몰랐다. 할아버지는 으레 그런 분, 무서운 분, 구두쇠라서 매사에 아끼고 야단치는 분으로만 여겼다.

'귀한 자식일수록 속으로 사랑하라'라는 그 할아버지의 말씀, 오십을 넘긴 지금에야 그 말씀이 내게 진하게 감명을 준 것은 부모의 지나친 보호 아래 귀하게 자란 자식들이 인생의 엇길로 가는 걸 숱하게 보아 왔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구한말, 종갓집 종손으로 태어나서 소년 시절 나라 잃는 설움을 당했고, 청년 시절에는 기미 만세를 겪었고, 장년 시절에는 식민지 백성으로 사느라 무수한 고초를 맛보았다. 일제의 압제에서 풀려난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미군정과 좌우익의 반목 갈등,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하신 할아버지는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데 숱한 역경이 굽이굽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당신의 귀한 손자지만, 그 손자의 평생을 당신이 책임질 수 없는 일이니 물거품 같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어떤 역경도 헤쳐 갈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을 길러 주는 게 올바른 교육이라고 생각해서 나를 엄하게 키우셨나 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느 날 수업 중에 담임 선생님이 교실밖에 할아버지가 찾아왔으니 나가 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두루마기 차림에 갓까지 쓰고 계셨다. 내가 웬일로 오셨느냐고 여쭙자 그냥 네가 보고 싶어 왔다고 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할아버지는 그 길로 서울로 갔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손을 잡고 통일할 생각은 않고 서로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애꿎은 젊은이들만 죽게 하는데, 고향 출신 국회의원이 바른 말 한 마디 못한다고 항의하고 오셨다고 했다.

이듬해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당신이 임종하실 때 이틀이나 말문을 닫은 채 사경을 헤매다가 내가 도착한 후, 내 손을 꽉 잡은 채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대들보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을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여 이태만에 기왓장까지 왕창 내려앉고 말았다.

"장(長)은 송장이 되기 십상이니, 장은 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해방과 6.25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똑똑한 인물들이 무수히 총대 메고 나서다가 참혹하게 죽거나 행방불명된 것을 보고서 남긴 말씀으로 생각된다. 돌아가실 때 미처 선산으로 모시지 못한 것을 20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내 손으로 두 분을 합장(合葬)으로 선산에 모셨다.

나는 이따금 약주냄새 물씬하던 할아버지의 체취가 그립다. 조선의 혼을 그대로 지녔던 할아버지, 여태 내 혀끝에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따다 주던 산딸기의 담박한 맛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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