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기피현상', 원인 따로 있다

[집중취재] 이공계의 꽃, 이공계의 변호사 '기술사' 문제있다

등록 2003.01.04 03:58수정 2003.01.0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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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국가기술사시험'에 합격한 권모(47)씨는 얼마 전 경기도 고양 시에서 기술사와 관련이 없는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

권씨는 "기술사 자격을 취득하면 뭔가 좀 나아질 듯 싶어 수년간을 가족도 버리고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따낸 자격증이지만 지금까지 취업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기술사 자격증을 '장농면허'로 썩혀왔다"고 말했다.

10년 전 기술사 자격시험에 합격, 한때는 연봉 1억5천만원 이상을 받았던 김모(52)씨도 사정은 마찬가지. IMF한파가 시작되면서 국내경기가 크게 침체된 데다 정식 기술사가 아닌 인정기술사들이 기술사 자리를 대신하면서 김씨는 5년째 '백수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처럼 이공계의 꽃, 이공계의 변호사로 불리며 잘 나가던 기술사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자격증만 취득하면 수억원의 연봉을 보장받았던 기술사 자격증은 이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일부 기술사들은 장기간의 실업자생활로 인해 끼니를 걱정해야할 만큼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사들은 오늘날 이공계 기피현상의 중심에 '기술사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용지물로 전락한 기술사 제도, 무엇이 문제인지 집중취재했다.

①실태

'국가기술사제도'의 역사는 지금부터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기인 지난 1963년, 국가경제개발 5개년 사업의 일환으로 기술사법이 제정, 공포되면서부터다.

제도가 시행된 이래 지금까지 배출된 기술사는 2만5000여명. 정보통신, 정보처리, 기계, 전자, 전기, 화학, 항공, 핵연료, 차량, 수자원, 선박, 환경 등 총 97개 분야의 기술사들이 거의 해마다 배출되고 있다.

이들 기술사들은 한때 산업현장의 꽃으로 불리며 관련 분야 최고의 연봉으로 스카웃될 만큼 인기가 높은 선택된 직업이었다. 시험이 어려운 만큼 자격증 취득자들에게 그만한 대우를 해주었던 셈이다.

일례로 2002년 4월 18일 발표된 제66회 기술사시험의 경우 합격자는 전체 응시자의 3% 미만에 불과했다. 이는 사법고시(8%), 행정고시(8%) 등 다른 시험과 비교해도 월등히 낮은 합격률로, 기술사 시험을 이공계의 변호사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때문에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다수 이공계대학 졸업생들의 최종 목표는 국가고시인 기술사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확 바뀌었다. 처우는 고사하고 생계를 우려해야할 지경에 이르면서 기술사 시험은커녕 이공계 기피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②막노동판으로 내몰린 기술사


기술사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고 있는 이면에는 무엇보다 '대책 없는 정부정책'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기술사들은 입을 모은다.

기술사 문제가 발단이 돼 지난해 11월 설립된 대한기술사협회(회장 고영회)와 관련업계 등에 따르면 변호사, 의사, 변리사, 공인회계사, 한의사, 수의사, 약사, 법무사, 세무사 등 대다수 전문직종은 관련법에 따라 일정한 업무영역이 설정돼 있고 자격증을 얻은 전문가만이 관련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법제화돼 있다.


이처럼 업무영역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은 이들 직종의 경우 무엇보다 고도의 전문지식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사의 경우 기술사법만 존재할 뿐 '업무 영역'이 설정돼 있지 않아 관련 분야에서 일정한 학력자로서 경험을 쌓은 사람이면 누구나 기술사업무를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현행 '인정기술사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인정기술사의 한 영역인 '특급기술자'의 경우 일정한 경력(대졸 12년, 전문대졸 14년, 고졸 18년)을 쌓으면 정부가 기술사와 똑같은 자격을 공짜로 부여하고 있다. 또 기술사조차 10년 이상 경력이 있어야 주어지는 '수석감리사자격'의 경우도 일정한 경력(대졸 22년, 전문대졸 25년, 고졸 28년)만 있으면 자격이 공짜로 주어진다.

이 때문에 2만 5천여 명에 불과하던 기술사수는 현재 10만여명까지 늘어나 '기술사 과잉공급시대'를 맞고 있다. 문제는 현장경력을 입증하는 서류만 제출하면 실력과 무관하게 '인정기술사' 자격이 주어지고, 이들이 전문지식과 기술이 요구되는 기술사 업무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어렵게 고시에 합격한 상당수 정통 기술사들은 일거리가 없어 막노동판을 전전긍긍하는 신세로 바뀌었다.

대한기술사협회 고영회 회장은 "정부가 특정 이익단체들의 입장만을 받아들여 무시험자들에게 기술사와 동급인 '인정기술사자격'을 공짜로 부여하면서 비리와 부실 등 각종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며 "이렇게 배출된 인정기술사들이 국가공인시험을 통과한 기술사들의 4배에 달한다"고 말했다.

5년간의 독학끝에 2년 전에 기술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는 손모씨(42)는 "기술인력이 과잉 공급될수록 사업자들은 싼 인건비로 기술사들을 활용할 수 있어 이를 부추기는 측면이 강하다"며 "어렵게 따낸 자격증이 장농면허가 되면서 요즘은 남몰래 포장마차를 하면서 하루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③업무 영역 법제화가 해결책

기술사들은 현재의 기술사 문제는 정부가 지난 92년 부족한 기술사를 보충하기 위해 탁상행정식으로 '인정기술사제도'를 도입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기술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이 마구잡이식으로 받을 수 있는 현행 '인정기술사제도'를 폐지하고, 기술사의 업무영역을 명확히 하기 위한 법개정이 시급하다는 것이 정통 기술사들의 주장이다.

대한기술사협회 관계자는 "그 동안 기술사를 전문가로 활용하기 위한 법개정이 의원입법과 정부(과학기술부)입법 형식으로 추진됐지만 노동부가 '산업기사-기사-기술사'라는 기존의 자격체계가 무너진다는 이유로 이를 극렬하게 반대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며 "기술사를 단순 노무직으로 취급하는 노동부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기술사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한때 막노동까지 했었다는 한 기술사는 "현재의 '기술사 인정제도'는 소정의 경력을 가진 간호사나 물리치료사에게 의사 자격증을 주고, 변호사 사무장에게 변호사 자격증을 주고, 법원근무 일반 사무직에게 인정판사 자격을 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며 "정부는 이공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학금을 더 주겠다는 식의 회유성 정책에 앞서 이공계 기피현상이 왜 발생하고 있는지 그 원인부터 철저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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