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온 세상 눈에 덮인 남도

추악함은 다 덮어버리고 아름다움만 건져

등록 2003.01.06 21:32수정 2003.01.0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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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밤새 이런 눈이 내리더이다

밤새 이런 눈이 내리더이다 ⓒ 김규환

눈이 펄펄, 펑펑 내렸습니다. 고향 가는 길을 눈이 막아도 한 번 나선 길 끝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정읍 근처에 이르니 눈이 앞을 가리고 바닥도 얼어붙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졸이며 가기엔 이미 한계를 넘어선 듯 도로 사정은 사람 목숨을 내놓으라고 할 지경이었습니다.


휴게소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정읍휴게소에 들러 체인을 끼우니 아무리 밟아도 70km 이상 나가지가 않았습니다. 라디오 볼륨을 최대로 해도 체인도는 소리에 아무 말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곳곳에 종종거리는 차들이 가로막고 있어 서울에서 12시 30분에 나서 밤 9시 30분에 도착한 긴 여정이었습니다.

a 눈 덮인 고향길

눈 덮인 고향길 ⓒ 김규환


a 느티나무도 눈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느티나무도 눈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 김규환

웬만하면 다시 서울로 가든가 중간에서 머물 수도 있지만 그날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 다니던 때 나를 포함하여 삼총사 중 두 명은 사촌 형제입니다. 두 친구의 할머니가 돌아가셨기에 꼭 가봐야했습니다. 간신히 도착해보니 손님도 거의 없었습니다. 광주 근처에서 머무른 사람, 고개를 넘어오다가 다시 광주로 간 사람들 태반이었고 백아산이 있는 화순 북면 사람들도 거의 오지 못했습니다. 가족들과 마을 어른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간 친구집이었지만 할머님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무척 따뜻한 기운이 돌았습니다. 형제들 우애가 좋아 보였습니다. 인선이와 중기랑 홍어에 술을 꼭두새벽까지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눈은 그칠 줄 모릅니다. 이러다 내일 아침 상여나 나갈까 모르겠습니다.

a 폭설

폭설 ⓒ 김규환

그날 하늘에서 수제비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까만 수제비에 가까웠습니다. 오랜만에 하느님은 솜사탕보다 멋진 눈과 20년 전 아련한 장면을 선사했습니다. 벌러덩 눈 위에 드러누워 내 형상을 복사하고 싶습니다. 산으로 기어올라가 쏘다니고 싶었습니다. 다시 추억 속에 버려 둔 소녀를 찾고도 싶었습니다.

하도 눈이 많이 와 쓸기가 겁납니다. 예전엔 눈을 치울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집이든간에 아침 해가 동산에 떠오르면 아버님이 제일 먼저 기침을 하시고 어머니는 뒤따라서 아침밥을 하십니다. 아버지는 쇠죽을 데워주시고 새로 끓이십니다.


a 오늘은 가득 물을 데웠습니다.

오늘은 가득 물을 데웠습니다. ⓒ 김규환

아이들 대여섯 명은 아침 밥 먹기 전에 아래채까지 가는 길과 고샅길을 널찍하게 쓸어갑니다. 남의 눈에 띄는 곳은 더 넓게 쓸어 칭찬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호호 불며 '버버리장갑'(벙어리장갑)을 끼고 눈을 쓸다가 손이 시리면 아버지 옆에 붙어 앉아 발도 녹이고 손도 데웁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더 뽀짝 오그라"하셨습니다.

아침을 먹고 눈이 조금 녹기를 기다렸다가 잘 뭉쳐지기 시작하면 당그레를 자져다가 밀어붙여 바지게에 실어 냇가에 버렸습니다. 때론 더 녹으면 마당 가상에서부터 가운데로 향하여 눈을 굴려갑니다. 마당 자갈도 달라 붙고 지푸라기도 엉겨 붙습니다. 욕심꾸러기 아이들은 굴리다 보면 다섯이서 들어올리기에도 벅찬 커다란 눈사람을 만듭니다. 정 안 되면 눈사람 대가리를 따로 굴리고 그 전 것은 몸뚱아리로 대체합니다. 대문 앞에 집집마다 두세 개씩 눈사람이 우리를 지켜줬습니다.


a 눈 위에 찍힌 그 친구 발자욱

눈 위에 찍힌 그 친구 발자욱 ⓒ 김규환

올해 소한(小寒)에도 날이 무척 춥습니다. 편리 추구를 위해 놓았던 길도 덮고 온갖 먼지도 덮고 사람의 추악한 모습도 일시에 다 덮어버렸습니다. 거짓, 위선, 교활함을 잠시 뭍어 두기로 했는가 봅니다. 이런 날은 용서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냥 아름답고 깨끗한 곳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눈 속에서는 얼음이 얼기 시작했습니다. 차곡차곡 쌓이면서 아랫 눈이 녹아 이내 얼어 들어갔습니다. 시려운 발을 한두 번 움직이며 꿈틀대더니 개구리가 반 발짝 살며시 더 땅 속으로 발을 들이밀어 넣었습니다. 시린 성에 조각이 땅 속으로 따라 들어왔습니다. 밤새 대지에 솜이불이 하얗게 내렸습니다.

a 정겨운 고샅길

정겨운 고샅길 ⓒ 김규환

아이들은 눈이 소복이 쌓이던 날 비료 부대를 할머니께 찾아달라 해서 눈썰매를 탔습니다. 누가 끌어줄 필요도 없습니다. 위로 푸대자루 하나씩을 들고 뛰어 올라가 엉덩이를 올려 놓으면 잘도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요리조리 고꾸라지고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춥다고 하기는커녕 해지는 줄을 모릅니다. 바지가랑이에는 눈 고드름이 열립니다. 코도 빨갛고 볼도 상기되어 있습니다.

a 장독대도 추워 서로 껴안고 있습니다.

장독대도 추워 서로 껴안고 있습니다. ⓒ 김규환

오늘 같은 날 고샅길을 돌면 복사꽃 얼굴을 한 이쁜 소녀가 나타날 지도 모릅니다. 집 앞에 서성이며 "은하야!"라고 문에 대고 살짝 불러 주면 10분 후 쯤에나 나타날 겁니다. 소리가 나자 마자 나오면 어른들이 "어딜가느냐?" 하며 바로 잡힐 것이기 때문에 소녀는 조심스럽습니다. 태연히 겉옷을 걸치고 아래채 측간에나 가는 체 해야 합니다.

오돌오돌 떨면서 무슨 그리 나눌 대화가 많았던지 남자와 여자는 밖에 서 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중2 여자아이는 자신의 부엌이나 쇠죽 쑤던 부삭 앞으로 가서 불을 쬐잔 말을 못합니다. 들켰다가는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밤이 깊어가고 추위가 귀를 때리자 남학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머니에 넣어 뒀던 편지를 건네고 종종 걸음으로 사라집니다. 잘 들어가 자란 말도 잊고 말입니다. 움찔 한 쪽으로 미끄러져 넘어지려더니 다시 똑바로 서서 뒷모습을 보이고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멀어져 갔습니다. 엉겁결에 받아든 소녀는 밤새 한 잠 이루질 못했답니다.

a 소나무 가지도 휘청거립니다.

소나무 가지도 휘청거립니다. ⓒ 김규환

나이 들어서 봐도 눈은 아름답습니다. 어릴 적 아름다운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눈은 천사 얼굴과 닮았습니다. 천사님 설날에도 꼭 한 번 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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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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