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슬픈 옛 이야기
생사잠은 곤륜신의 집안의 가보였다. 그런데 월궁옥녀가 지니고 있던 그것이 북의의 손에 들어간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을 걸고 내기가 진행되는 것을 알고 부친을 졸라 불공평한 시험에 들게 한 그녀는 대사형인 목재충이 탕약으로는 편풍을 다스릴 수 없다며 물러서자 몹시도 미안하였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안함 때문에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작은 사형과의 혼례를 포기할 수 없던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만 있었다.
어찌 되었건 자신에게 몹시도 잘해주던 대사형이었다. 그런 대사형이 실의에 빠져 술만 마시던 어느 날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 월궁옥녀는 그를 찾았다.
그리고는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려다가 애지중지하던 옥잠을 뽑아 건넸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자신의 손때가 묻은 그것을 줄 터이니 잊어달라는 말을 했다. 하여 옥잠이 북의의 손에 있었던 것이다.
이날이 바로 곤륜신의가 편풍을 털고 일어서던 날이었다. 다시 말해 월궁옥녀가 남의의 여인으로 확정된 날이었다. 이때 월궁옥녀는 생사잠에 얽힌 비밀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조상은 전설처럼 전해지는 신의인 편작의 제자였다. 그렇기에 곤륜신의에게 편작내경과 외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생사잠 역시 편작이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있었기에 전설의 신의로 추앙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사잠의 머리 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세 개 뚫려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일각사왕(一角蛇王)의 자그마한 뿔이 들어 있다. 세상의 온갖 괴이한 것을 기록해 놓은 산해경(山海經) 서차삼경(西次三經)을 보면 일각사왕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서쪽으로 물길 따라 사백 리를 가면 유사(流沙)라고 하며, 다시 이백 리를 가면 나모지산( 母之山)에 닿게 된다. 신(神) 장승(長乘)이 이곳을 지니고 있는데 이 신은 하늘의 구덕(九德)의 표상이다.
< 중략 >
이러한 산 아래에는 뱀이 있는데 일각사왕이라 부른다. 이것은 만사지왕(萬蛇之王)으로 머리에 뿔이 달려 있으며 날개가 달려 허공을 날 수 있다. 이것의 뿔은 만독(萬毒)을 해독하는 효용이 있다. >
일각사왕은 그 크기가 불과 세 치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사지왕으로 지칭되는 것은 허공을 날 수 있는 날개와 지독하다는 표현 이외에는 마땅한 표현이 없는 맹독(猛毒) 때문이었다.
이것의 먹이는 놀랍게도 뱀이었다. 알에서 갓 부화한 다른 뱀의 새끼를 잡아먹는 데 특히 독사들을 주로 잡아먹었다.
덩치만 믿고 멋모르고 덤벼든 어미들은 일각사왕에게 덤벼들었다가 물리거나 비늘에 스치기만 해도 한 줌 혈수로 녹아든다. 그렇기에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뱀들이 있지만 일각사왕이 나타나면 모두 도망가기 바쁘다.
그리고 산해경에 기록된 대로 놈의 뿔을 물에 담갔다가 마시면 제아무리 심한 독에 중독된다 하더라도 즉각 해독된다.
뱀에게 물려 중독된 사람을 살리는 데 있어 침(鍼)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다. 탕약 역시 다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오보추혼사(五步墜魂蛇)와 같은 독사에게 물리면 소용이 없다.
하지만 일각사왕의 뿔은 달랐다. 그것을 잠시 담갔던 물만 마시면 붓기가 빠지는 것은 물론 즉각 일어나서 돌아다닐 수 있다. 생사잠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편작이 아직 젊었던 시절에 약재를 구하기 위하여 깊은 산중에 들었다가 어느 이름 없는 계곡에서 일각사왕의 사체(死體)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일각사왕의 유일한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만년신학(萬年神鶴)과 처절할 정도의 혈투를 벌인 끝에 양패구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각사왕의 뿔을 얻은 그는 혹여 누군가 탐을 낼까 싶어 그것을 생사잠 안에 숨겼다. 사내들이란 여인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탐내지 않기에 여인들이나 사용할 법한 옥잠 속에 숨긴 것이다.
아무튼 북의가 강호에서 혁혁한 의명을 떨칠 즈음 곤륜산에서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약초를 캐겠다며 나섰던 곤륜신의가 잡아온 한 마리 오사(烏蛇) 때문이었다.
전신이 완전한 흑색인 오사는 여타 뱀들과는 달리 비늘이라곤 하나도 없는 괴물이었다. 굵기래 봐야 어린아이 손가락 굵기 정도 밖에 안 되는 이것의 길이는 불과 네 치 정도 되었다.
오사는 다른 뱀들처럼 개구리나 쥐 같은 작은 짐승들을 사냥하지 않는다. 비늘조차 없기에 아무런 소음도 없이 이동하는 이것은 큰 짐승의 귀나 콧구멍으로 들어간 뒤 폐(肺)에서 산다. 그곳에서 숨을 쉬면서 선혈을 빨아먹으면서 사는 것이다.
곤륜신의가 이것을 발견한 것은 약초를 캐러나갔다가 사슴을 사냥한 직후였다. 그는 사냥한 사슴의 배를 갈라 가장 먼저 간을 꺼냈다. 그것을 잘 말려두면 약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내장을 긁어내고 화톳불 위에 그것을 굽던 중 곤륜신의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긁어낸 내장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오사를 발견한 것이다.
오사는 아주 귀중한 약재이다. 기력이 쇠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던 노인이라 할지라도 한 마리만 고아 먹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벌떡 일어나 펄펄 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삼처사첩을 거느릴 수 있는 정력의 소유자가 된다.
하지만 이처럼 사람의 눈에 뜨이는 경우가 드물기에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살 수 없는 일종의 영약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곤륜신의는 사위이자 제자인 호문경이 다른 것은 다 좋으나 유난히도 정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여 많은 보약을 달여 먹였으나 별무소용이었다. 그래서인지 혼례를 올린 지 일 년이 넘었건만 아직 수태 소식이 없었다.
곤륜신의는 많은 손자 손녀가 태어나기를 바랬다. 그래서 자신의 슬하에서 재롱 떠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님을 보아야 뽕을 딸 것이 아닌가!
정력이 약한 사위 때문에 요즘엔 여식이 거의 독수공방하다시피 하는 상황이었다. 하여 오사를 생포한 즉시 만사를 제쳐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월궁옥녀를 불러 그것을 보여주면서 이제 손자를 볼 수 있게 되었다며 희희낙락하였다.
이때 호문경은 곤륜산 아래에 자리잡은 저잣거리로 향하고 있었다. 월궁옥녀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곤륜산은 하루에 오르내릴 수 있는 산이 아니다. 그렇기에 왕복 육 일은 걸릴 멀다면 먼 길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길이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하산하고 있었다.
한편, 곤륜신의는 사위가 돌아오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약초를 캐겠다면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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