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칫국에 '책가위'는 한 달을 못 버텼다

호롱불에 모여 산뜻한 '책가위' 싸는 재미를 아시나요

등록 2003.03.03 23:36수정 2003.03.0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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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대개 학용품을 새 걸로 장만하고 싶어한다. 책가방에 담길 여러 물건 중에서 책은 봄방학 때 미리 받아 한 번 쯤은 잉크 냄새를 흠흠 맡아보면서 '그래 내가 한 학년 올라가는 구나!'하며 대견스러움을 자찬하고 새 다짐을 한다.


'올해는 기필코 영민이 그 놈보다는 잘 할 거야!', '은하, 고 가시나 에게 절대 질 수 없지'하며 전의를 불태우는 게 새 학기를 맞는 학생들의 생각이다.

봄방학 하는 날, 새 책을 받는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학교에 가게 되면 그 시절-가죽이 아닌 고무가방이나 보자기를 가방으로 썼던 때는 찢어지는 게 다반사다.

이런 일을 모면하려면 급히 학교 마을 점방에 가서 칡덩굴이나 '사내키'(새끼줄)를 얻어와 八자 매듭을 지어 묶어야 한다. 남학생들은 문제가 안되지만 저학년이나 여학생들은 손가락이 잘리는 느낌 때문에 몇 백 미터를 못 가 자꾸 짐을 부리고 쉬게되니 대개 남자아이들이 거들어 집에 같이 가곤 했다. 동무라는 게 이런 거다.

날을 잡아 저녁상을 물리고 형제들이 각자 자신의 '책가위'(책―가위(―)[―까―][명사][하다형 타동사] 책이 상하지 않게 덧입히는 일, 또는 그 물건. [종이나 헝겊·비닐 따위로 만듦.] 가의(加衣). 책가의. 책갑(甲). 책싸개. 책의.<두산동아대백과사전 >)를 싸기 위해 당시에는 대낮처럼 환한 호롱불 아래로 모인다. 가위나 칼은 부엌에 있는 걸로 충분하다. 달력을 뒤집어 하얀 뒷면이 겉면이 되게 하는데 가장 좋은 달력은 늘 막내차지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형과 누이에게 나눠줬다.

먼저 책을 둘러 규격에 맞는가 재보고 종이를 일정한 크기로 자른 다음 한 쪽부터 제비초리 반대 모양으로 접어 넣고 뒤쪽을 마무리하면 된다. 가위나 칼은 모서리 부분을 조금 자를때 빼곤 별 쓰임이 없다.


이게 없으면 뭐든지 찾아야 한다. 골판지에 가까운 두꺼운 종이를 갖다 싸야 하고 그래도 안되면 신문 종이라도 싸야 학교갈 맛이 났다.

나중에 못자리용 비닐이 고향 산천을 점령한 뒤로 비닐이 대중화되면서 부터 많이 쓰였지만 자꾸 벗겨지는 통에 실로 성가신 일을 여러 번 기다린다. 한 두 번은 다시 입혀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뒤로는 냅둔다. 테이프를 떼어 붙여 단단히 고정을 해도 비닐이 종이만 못한 이유는 얼마 뒤 손에 닳고 찢겨 산뜻한 맛이 사라져 볼품 없어진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위에 자신의 이니셜을 남겨 두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싸든 간에 언제나 미운 털이 하나씩 있게 마련인데 다름 아닌 미술책과 음악책이다. 이 두 녀석들은 마치 자신들이 예술을 한다고 거들먹거리는 건지 몰라도 삐딱하게 나간다. 알맞게 두껍지도 않고 책 판형이 다른 것보다 훨씬 커서 큰 종이를 별도로 구해야 하고 보통 달력 한 장이면 두 장을 싸게 되는데 이건 그렇지 않아 한 장으로 모자라고 두 장 분량을 다 잡아 먹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황에 직면하게 한다. 웬만한 공력을 들이지 않고는 책을 펼치려는 순간 겉표지가 접히면서 옷을 벗고 마는 일이 허다했다.

책가위를 다 입히고 나서 두꺼운 펜으로 "국어/ 3-1/ 4번/ 김규환"이라고 정열을 해서 한 칸 씩 써내려 간다. 시골 학교에는 학생 수가 적어서 언제나 1반만 있었고 1반이 한 학년이었으며 책도둑이 생길 리가 없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모여 살았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실과 바른생활 음악 미술 체육 책을 하루 저녁을 공들여 싸도 한 달을 버티지 못한다. 가방 안에 책과 도시락, 김치를 함께 넣어 앞 뒤 보지 않고 돌부리도 무시하고 신작로를 마구 달려가고 논둑과 논을 가로질러 가므로 아래부터 순서대로 차곡차곡 잘 정리해도 그 때 뿐 뒤집히고 엉켜 성할 리 없는 것이다.

김칫국물이 흘러 가방 바닥에 고였다가 책이 탱탱 불어 신김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색깔은 마치 김치 절여 둔 상태였으니 지금 아이들이 그걸 상상이나 하겠는가! 자그만 보자기 만들 형편이 안 되는 집이 무척 많았다.

덧붙이는 글 | 책가위 싸는 일은 이제 추억으로 멈춰서고 내 머리에만 저장돼 있습니다. 해강이와 솔강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잊지 않고 책가위 싸는 것을 도와줄 생각입니다. 오늘부터 어린이집에 들어간 세 살, 두 살배기 아이들이니 언제 그 때가 올런지요?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 뉴스비젼21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책가위 싸는 일은 이제 추억으로 멈춰서고 내 머리에만 저장돼 있습니다. 해강이와 솔강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잊지 않고 책가위 싸는 것을 도와줄 생각입니다. 오늘부터 어린이집에 들어간 세 살, 두 살배기 아이들이니 언제 그 때가 올런지요?  

이 기사는 하니리포터, 뉴스비젼21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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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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