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를 보면 내 마음은 왜 그리도

등록 2003.04.04 07:15수정 2003.04.0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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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꽃 시절이다. 4월이 시작되면서 산야의 진달래도 만발했다. 보면 볼수록 반갑고 정답고,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을 안겨 주기도 하는 진달래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겐 늘 '고향'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꽃이기도 하다.

꽃샘추위와 쾌청치 못한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봄기운을 체감하던 지난 3월 내내 나는 백화산을 오를 때마다 야릇한 긴장감 같은 것을 가슴에 안곤 했다. 그것은 진달래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곧 진달래의 꽃망울들을 보게 되고, 온 산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풍경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은 날마다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진달래의 꽃망울들을 보는 순간부터 내 가슴엔 반가움이 가득 찼다. 덜 풀리고 바람이 많은 날씨 탓인지 꽃망울들이 이내 벙글지 않는 것을 보면서 괜히 조바심을 하기도 했다. 진달래들이 뿌리를 박고 있는 위치에 따라, 그리고 같은 지점에서 이웃해 있으면서도 일찍 피는 놈이 있고 더디게 피는 놈이 있음을 느끼면서 어서 모두 함께 만발한 상황이 되기를 바라고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산길을 오르다가 반갑지 않은 장면을 보았다. 꽃들이 활짝 핀 키 큰 진달래 가지의 밑둥을 잘라서 손에 들고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었고, 나와 같은 또래의 남정네였다. 나는 그와 인사를 하고 나서 좀 뜨악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진달래를 보며 한마디했다.

"어제까지두 진달래 핀 걸 뭇 봤는디…. 아마두 오늘 제일 먼저 핀 눔인개빈디, 서둘러 부지런을 피웠다가 그만 지 명 재촉을 허구 말었구먼. 막 피어나자마자 그날루 그냥…."

뼈가 있는 내 말에 그 친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하두 키두 크구 탐스럽구 이뻐서…. 금방새 여기저기 많이 필 테니께…. 너무 반가운 마음으루다, 흐흐."


나는 그의 말과 표정에서 순박성 같은 것이 느껴져서 더 무안하지 않게 씩 웃어주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다시 산길을 오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밑둥까지 통째로 잘려진 그 진달래 그루가 더욱 측은하게 느껴졌다. 키 크고 탐스럽고 예쁜 것이 죄가 된 상황, 사람에게 반가움을 안겨 준 탓에 그만 횡액을 당한 그 모순적인 일이 괜히 얄궂게만 느껴져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3월을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진달래들은 드문드문 하나 둘씩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심호흡을 하며 붉게 피어난 진달래들에게 정겹게 눈을 주곤 했다. 불현듯 내 어렸을 적 풍경들이 떠오르는 것은, 썩 유쾌한 것은 아닐지라도 내가 사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어느 해 봄, 나는 동무 몇 명과 함께 점심 시간에 잠시 학교 뒤편 백화산의 '교장바위'를 오른 일이 있었다. 무슨 일로, 누구의 발동으로 산을 올랐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산을 올랐다가 다시 교실로 돌아온 기억으로 보아 그때가 점심 시간이었던 것은 거의 분명하지 싶다.

백화산의 교장바위 부근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해 있었다. 누구의 제안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일제히 진달래꽃을 꺾기 시작했다. 각기 한 다발씩 진달래꽃을 꺾어들고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교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무줄로 묶은 꽃다발 하나를 담임 선생님의 교탁 위에다 올려놓고, 다른 꽃다발들은 빈 병과 깡통들을 찾아서 꽂아 가지고 남쪽 창문의 턱에다가 늘어놓았다. 우리들 딴에는 제법 의견을 내서 봄의 운치를 위해 잘한답시고 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후 수업 시작종과 함께 교실로 들어오신 선생님은 교탁에 놓인 진달래 꽃다발을 보자 기쁜 표정을 짓기는커녕 완연히 언짢은 기색이었다. 창문턱에 늘어놓은 풍성한 진달래꽃으로 한결 환해진 것 같은 교실 안에서 선생님의 칭찬을 잔뜩 기대했던 우리는 뜻밖의 분위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달래꽃을 이렇게나 많이 꺾어오다니, 철딱서니 없는 놈들 같으리라구!"

한결 화난 표정인 선생님은 창문턱의 진달래꽃과 함께 교실 안의 아이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철딱서니 없는 놈들을 일어서게 해서 당장 호통을 칠 줄 알았더니, 선생님은 잠시 후에 부드러운 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 꽃을 꺾어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야. 선생님께 꽃 선물을 하고, 교실을 환하게 해놓으려는 뜻은 갸륵하지만, 결코 잘한 짓이 아니야. 그 이유를 선생님이 설명해 줄 테니까 잘 듣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산에서 꽃을 꺾어오지 않기 바란다."

그 날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은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산에 피어난 꽃을 내 것으로 삼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보고 즐겨야 할 공동의 사물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거나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그 두 가지 말씀은 아이들에게 좋은 가르침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에게도 선생님의 그 말씀은 명심 사항이 되었다. 그 후부터는 흔한 진달래꽃 하나라도 함부로 꺾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나는 봄철에 진달래꽃을 꺾지 않는 대신 곧 봄부터 가을까지 진달래의 뿌리를 무수히 통째로 캐내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 해에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누님이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한꺼번에 두 아이를 중학교에 보내기가 어려운 우리 집의 가난한 형편 때문이었다.

중학교 진학을 일년 뒤로 미루고 공부를 쉰 일년 동안 나는 거의 나무꾼으로 살았다.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날이 많았다. 땔감이 참으로 귀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산에서 해오는 나무는 여러 가지였다. 그 중의 하나가 나무들의 뿌리를 캐오는 일이었다. 괭이와 도끼를 이용하여 주로 벌목하고 남은 소나무의 밑둥과 작은 나무 그루터기, 땅바닥 위로 노출되어 있는 큰 나무의 뿌리를 캐고 잘랐으나, 사정의 여의치 않으면 진달래 뿌리도 좋았다. 진달래 뿌리만 캐서 발채 가득 지고 온 날도 많았다. 진달래 뿌리도 햇볕에 말려서 아궁이에 넣으면 불이 괄고 오래 갔다.

진달래 뿌리를 캐다 보면 초등학생 시절 백화산에서 진달래꽃을 다발로 꺾어다가 교실에다 놓은 것 때문에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던 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때도 있었다. 선생님의 그 말씀이 내 가슴에서 이상한 통증을 유발시키는 것을 경험하는 날도….

생각하면 나는 소년 시절에 산림을 훼손하는 짓을 많이 했고, 진달래에게도 죄를 많이 지은 셈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스스로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때고 사는 집들이 많았다. 숱한 사람들이 산에서 숱하게 진달래 뿌리를 캔 셈이었다. 그런데도 진달래들은 해마다 봄에는 이 산 저 산을 장식했고, 그것은 오늘까지도 어김이 없다.

그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때로 봐서는 진달래 뿌리는 하나도 남을 것 같지 않았다. 수많은 집들의 아궁이 속에서 불태워진 진달래 뿌리들이 그 시절에는 그렇게 많았건만, 산야의 진달래들은 해마다 그냥 그대로이고, 진달래 뿌리까지 캐서 불을 때고 사는 집들은 이제 하나도 없게 되었으니, 생각하면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언젠가 나는 진달래꽃에 대한 상념 탓에 어줍잖은 시 한 편을 지은 일이 있다.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이런 시였다.


알지 못할래

또 금세 지나가겠지만
또 한 해 진달래 피는 시기를 맞았다
올해는 출타하는 일이 많아져서
먼길을 오래 오가며
질리도록 진달래를 본다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왜 해마다 진달래를 볼 적마다
가슴이 뭉클하고
숨이 막힐 것 같은지를…
왜 저 산야의 진달래 무리가
나에겐 막연한 슬픔이고 처연함이고
아련한 그리움인지를…
어언 오십 줄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나는 확실한 이유를 모른다
오히려 점점 더 막연해지는 것만 같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가슴 뭉클하고
눈물 글썽임이
더더욱 심해진다는 사실 뿐
오늘도 진달래를 보며
그저 눈물지었을 뿐….

(1999년 <시도> 72집)


시에 기록된 진달래에 대한 내 느낌이나 상념은 오늘도 여전하다. 공주영상정보대학에 출강했던 그때보다 요즘은 진달래를 더 자주 많이 본다. 거의 매일같이 오후에는 백화산을 오르니, 요즘은 진달래꽃과 더불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진달래꽃에 대한 내 마음의 그 모호함 속에서 어떤 근거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싶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진달래꽃을 보면서 느끼는 막연한 슬픔과 처연함과 아련한 그리움들의 속내를 명확히 갈무리할 자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냥 그대로 그 모호함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제는 내가 평소 다니는 등산로를 버리고, 태안초등학교 후문 앞으로 해서 '동학혁명군추모탑' 앞으로 이어진 길을 택했다. 동학혁명군추모탑 주변에도 여기저기 진달래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동학혁명군추모탑 주변의 진달래꽃들은 내게 좀더 막연한 슬픔과 처연함을 가슴 깊이 안겨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추모탑 앞의 돌계단에 앉아 진달래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동학혁명군추모탑이 세워져 있는 백화산 중턱의 그 자리는 100여 년 전 동학 북접(北接)의 봉기 이후 동학군이 관군·왜군과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인 곳이었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하여 쫓겨온 수백 명이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그들의 선혈이 저 진달래꽃과 함께 온 숲을 붉게 물들였던 바로 그 자리였다.

적어도 동학혁명군추모탑 주변의 진달래꽃들은 왜군의 총칼에 무참히 스러져간 동학군들의 넋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보는 것이 온당한 일일 터였다. 진달래꽃들을 보면서 100여 년 전 그 해 봄의 처절한 상황을 좀더 명료하게 상상해 보는 내 연상법이 다소 외롭고 처연한 것이기는 할 테지만….

이쯤에서는 태안 백화산의 동학혁명군추모탑과 관련하는 사항들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이 너무 길어지고 있으므로 그것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그리고 오늘은 백화산 동학혁명군추모탑 주변의 진달래들을 보여 드리는 것으로 이만 이야기를 맺고자 한다.

매일같이 백화산에서 진달래꽃들, 그 흐드러진 무리들을 보는 즐거움(행복한 슬픔)을 다시 누리기 위해 몸을 일으켜야 할 시간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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