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국제노동절 전야제가 열린 고려대 노천극장에는 2만여명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올 한해 비정규직 철폐를 핵심 목표로 세우고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갈 것을 밝혔다.오마이뉴스 김영균
"비정규직 철폐하자, 비정규직 철폐하자, 비정규직 철폐하자! 투쟁!"
4월 30일 저녁 8시,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노천극장에는 마치 월드컵 경기장의 함성과 같은 구호가 울려퍼졌다. 이어지는 칼날같은 목소리.
"지금 우리 노동자들은 116년전 노동자들과 너무 흡사합니다. 1300만 노동자 중 절반이 넘는 800만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월 70만원 이하의 임금으로 생존하고 있습니다. 12시간에서 15시간까지, 힘겹게 일하는 노동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116년전 현실과 지금, 과연 무엇이 다릅니까."
우레같은 함성과 박수소리 때문에 목소리는 다시 묻혔다. 그러나 노천극장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환한 무대에 서서 군중을 바라보는 이는 얼마전 만기출소한 뒤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복귀한 단병호(54)씨. 그가 연설에서 말한 "월 70만원 이하의 임금으로 생존하고 있는" 노동자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한국 양대노총의 한 축을 이끌고 있는 단 위원장의 연설과 그에 호응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 4월30일, 국제노동절(메이데이) 전야제가 열린 고려대 노천극장을 뒤흔든 이들의 화합은, 무대정면에 '차별철폐'라고 쓰인 녹색의 대형 걸개그림을 보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칼끝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올해 노동자들의 최대 목표는 바로 '비정규직 철폐'다.
"기름값, 운송료는 다 오르는데 수익은 늘지 않으니 빚만 늘어갈 뿐…."
"바로 얼마전, 우리는 또 다시 한 사람의 노동자를 떠나보냈습니다. 가혹한 현실과 사회가 우리 동지를 앗아갔습니다."
무대에서 울리는 또 다른 목소리. 줄잡아 2만여명 이상의 학생과 노동자, 시민이 모인 이날 행사장에는 카키색 조끼와 붉은 마스크, 붉은 머리띠로 똑같은 복장을 하고 나온 이들이 스탠드 한쪽을 가득 메웠다. 20대 후반부터 40, 50대 중년까지 약 6000여명의 노동자들.
'민주노총 전국운송하역노조 화물연대'라는 생소한 이름의 이들은 모두 왼쪽 가슴에 '근조'라고 쓰인 검은 리본을 달고 있었다. 화물연대의 대표자가, 한 조합원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함성이 울렸다.
"우리 모두 박상준 동지의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투쟁, 투쟁, 투쟁!"
전국 화물운송노조 포항지부 노조원 박상준(34). 지난 27일, 박씨는 늘어나는 빚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여섯살 아들, 네 살 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화물차량 한 대로 새우잠을 자며 전국 고속도로를 누볐지만, 박씨의 차는 곱절로 뛰는 기름값과 차량수리비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의 동료들은 자고 나면 늘어나는 빚에다 물류 배정을 하는 다단계 알선회사의 횡포까지, 잘 짜여진 사회의 '각본'이 박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노름도 안 하는 아주 착실한 가장이었습니다. 26일까지만 해도 '노동절 집회에 가야 한다'고 선배와 다짐을 했는데…, 죽기 전 동료에게 '죽고 싶다, 비전도 없고, 사회적응도 안 된다'고 남긴 말이 그대로 유언이 됐습니다."
화물노조에서 박씨와 같은 포항지부 소속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영근(35)씨. 조씨는 "화물차 운전 기사들은 모두 똑같은 처지"라고 입을 떼며 박씨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화물차를 사서 시작할 때 진 카드빚을 몽땅 갚더라도 경유가, 운송료, 중고차 수리비 등은 고스란히 화물 기사들의 몫입니다. 다단계로 물류 배정을 하는 회사들은 물건을 주며 이익을 챙기죠. 기름값, 운송료는 다 오르는데 수익은 늘지 않으니 빚만 늘어갈 뿐이고,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휴게소도 없는 게 우리 현실이죠."
화물 차량을 몬 지 2년째라는 조씨도 생활고에 허덕이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 준 게 이미 오래전 일이라는 조씨는 아내가 맞벌이로 생활비를 벌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자신의 현실 때문에 "가정 불화가 자주 있다"는 말을 남기고, 조씨는 대열로 돌아갔다.
화물노조는 30일, 박씨의 죽음에 항의하는 뜻으로 과천정부종합청사 앞에 차량을 놓고 시위를 벌인 뒤 이날 저녁 고려대로 집결했다.
"노동조합요? 회사가 무서워서 접근도 못해요."
▲비정규직 차별에 항의하는 퍼포먼스.오마이뉴스 김영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튼튼한 노동조합을 갖는 일이다. 그러나 '싼값에 부려먹기 쉽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사업주들이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그대로 두고보지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합법적 노동조합조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게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우리도 노동자입니다. 노동자면 노동자지, 특수고용직은 또 뭡니까? 사업주들은 노조사무실을 폐쇄하고 부당해고를 자행하면서 우리더러 불법 행동을 했다며 '법대로 하자'고 버티고 있습니다. 합법적인 조합활동이 해고사유가 될 수 있습니까?"
골프장 경기보조원 노조를 구성하고 있는 한성CC 황의정 위원장은 '특수고용직'으로 묶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합 활동에 대한 탄압을 성토했다. 산재, 고용 보험도 적용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조활동까지 제약을 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미래란 불안한 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요? 판매사원과 같은 비정규직들은 회사가 무서워서 접근도 못합니다. 노조활동을 했다간 개별적으로 계약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동료들과 함께 문화공연을 준비해 노동절 전야제 행사에 참석한 현대백화점 노조 김모(여·30)씨도 같은 현실을 말하고 있었다. 현대백화점 노조가 이처럼 큰 행사에 참석하고 공연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노조원들은 집회나 시위에 참가할 수도 없습니다. 항상 하루일과를 마치고 나면 밤이 늦어 모든 집회가 끝나는 시간이고…, 사원들이 매일 저녁 8시까지만 일한다는 사측의 설명은 말도 안됩니다. 백화점 문을 닫으면 하루를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죠."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조합활동을 꿈도 못꾸고, 그나마 있는 노조의 조합원들도 대외활동 시간이 원천적으로 가로막혀 있다는 얘기다. 그래도 김씨는 "현대백화점이 다른 백화점보다는 좀 낫다"며 웃었다.
김씨의 말대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어렵게라도 활동할 수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행복한 편이다. 단지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관리자들에게 식칼로 아킬레스건이 잘리는 테러를 당하는 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바로 얼마 전, 현대아산 사내하청지회 소속 한 노동자에게 일어난 일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고용허가제'가 아닙니다. 노동비자를 주세요"
"산업연수생제 철폐하고, 고용허가제 도입하라."
집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무대의 외침에 따라 2만여명이 구호를 외쳤다. 비슷한 시각, 고려대 노천극장 입구에서는 두 명의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열심히 서명을 받고, 선전 용지를 돌리고 있었다.
"고용허가제요? NO! 산업연수생제처럼 고용허가제는 또 다른 노예제도일 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당한 '노동비자'를 내달라는 거예요."
서툰 한국어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는 시라줄(Sirajul·26)과 쇼하크(Shohaz·30)씨. 두 사람 모두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4년전 한국에 건너왔다. 비정규직이면서도 외국인인 두 사람의 소망을, 같은 노동자로서 연대를 과시하던 한국인 노동자들은 모르고 있었다.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 민주노총은 1일 메이데이 행사를 시작으로 비정규직 차별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선다.오마이뉴스 김영균
"한국에 올 때 600만원을 주고 왔습니다. 한국돈 100만원이 방글라데시 노동자의 일반 월급 석달치라면 얼마나 큰돈입니까?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일방적으로 시한을 정해 모두 나가라고 합니다. 지금도 우린 불법체류자 신분이에요"
한국에 온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이름 대신 "야"로 불린다는 시라줄과 쇼하크씨는 어서 돈을 벌어 고국에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 기간동안 만이라도, 한국 정부가 노동비자를 내 주고 한 사람의 노동자로 대접해 주는 것이 두 사람의 소망이다.
올해로 113주년을 맞는 국제노동절. 노동자들의 기념일 전야제 행사는 촛불과 형광막대, 화려한 조명까지 동원돼 마치 축제와 같았지만, 차별 받는 이들의 목소리 또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5월 1일, 민주노총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메이데이를 맞아 본격적인 '비정규직 철폐 투쟁'에 나서고 있다.
| | 양노총 1일 대학로·여의도에서 노동절 행사 | | | | 5월1일 세계 노동절 113주년을 기념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대학로와 여의도에서 각각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민주노총(위원장 단병호)은 1일 오후 2시부터 대학로에서 3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비정규직 차별 철폐 △주5일근무제 도입 △파업관련 손배가압류 철회 △노동3권 보장 △경제자유구역 및 개방정책 중단 등을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본 행사 후 오후 3시30분부터 거리행진에 들어가 시청 앞 광장에서 행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민주노총은 노동절 기념대회를 시작으로 5월 한 달 동안 임단협 교섭과 함께 노동관련법 개선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6월 중순부터는 산별연맹 별로 임단협 시기집중 파업과 노동관계법 개정을 위한 대정치권 투쟁을 벌여나간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민주노총은 노동절 이름을 되찾기 위해 현행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는 법 개정 청원을 다음주 내에 국회에 제출키로 했다.
한편 한국노총(위원장 이남순)은 1일 오전 9시 여의도 문화마당에서 3000여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참가한 가운데 기념식과 함께 주5일근무 쟁취와 비정규직 차별철폐 거북이 달리기 대회를 개최했다. 한국노총은 노동절을 기점으로 비정규직 차별철폐 릴레이 1인 시위와 노동조건 저하없는 주5일제 쟁취를 위해 100만 전조합원 노동권 존중 배지 달기 운동을 벌이며 △주5일제 쟁취 △비정규직 차별철폐 △산업재해 추방 △구조조정 분쇄 투쟁을 펼칠 계획이다.
한국노총은 민주노총의 ‘노동절’ 법개정에 맞서 5월1일 '근로자의날'을 '세계노동절 기념일'로 명칭을 변경하고,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세계노동절 기념에 관한 법률'제정을 국회에 청원했다. / 박수원 기자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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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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