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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의 정원에 난 작은 길 ⓒ 방민호
눈을 감는다. 지금부터 나는 침묵의 정원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침묵의 정원. 사람들은 누구나 그곳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곳을 침묵의 정원으로 명명한 사람은 없었다. 그곳을 침묵의 정원으로 부르기 시작한 사람은 나다. 지금 그곳은 오직 내게만 침묵의 정원일 뿐이다.
겨울에 보았던 그곳의 풍경을 잊을 수 없다. 아침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눈발 속을 걸어서 그곳으로 갔다. 커다란 고동색 궁궐 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통과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궁궐 속은 흰 눈 세상이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눈밭을 걸어 다리를 건너 소로(小路)를 통해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침묵의 정원에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그의 힘이 느껴졌다. 눈꽃이 만발한 나무숲 속에서 그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본 듯도 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를 들이쉴 때마다 그가 내 몸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었다. 나만이 침묵의 정원을 알현(謁見)하고 있는 것이었다. 왕이 생각에 잠겨 있던 전각(殿閣), 왕비가 거닐던 연못, 패덕(悖德)한 왕을 몰아내려는 반란의 군사들이 분주하게 드나들던 작은 문이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대낮처럼 밝은 현대의 나날, 모두들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지금 그곳의 주인은 침묵, 바로 그였다. 나는 그가 꽁꽁 얼어붙은 연못의 수면 위에 보랏빛 연꽃으로 피어나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취하여 날이 저물도록 그곳에 앉아 있었다. 말을 잃어버린 채. 추위도 느끼지 못한 채로.
그곳의 이름은 후원(後苑). 궁궐의 북쪽에 있어 북원(北苑). 비밀스러운 정원이기에 비원(秘苑). 왕족만 들어갈 수 있어 금원(禁苑). 그리고 무엇보다 침묵의 정원.
그곳은 서울의 텅 빈 중심, 소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태풍의 눈,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의 황궁(皇宮).
막스 피카르트는 나의 벗.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 말의 의미를 다시 얻으리라.
막스 피카르트 - Max Picard (1888-1965), 『Die Welt des Schweigens 침묵의 세계』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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