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로 다시 재현된 ‘요술의 대공황’

1768년 청조시대의 위기와 그 교훈

등록 2003.05.11 06:37수정 2003.05.1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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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8년 초봄, 청조를 발칵 뒤집힌 희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봉건왕조사상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던 건륭제 제위 33년에 일어났던 이 사건은 후일 ‘요술(妖術)의 대공황’으로 기록되고 있다.

a 손님들의 발길이 끊긴 왕푸징 먹자골목 입구.

손님들의 발길이 끊긴 왕푸징 먹자골목 입구. ⓒ 박현숙

건륭제 제위기간중 최대의 위기로까지 평가되는 이 사건은, 당시 청조의 기층 민간사회뿐만 아니라 관료제도와 황권체제 전반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파장을 몰고 왔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사건은 기실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었던 ‘소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중국 쪄지앙(浙江) 더칭셴(德淸縣)에 있는 회이상스(慧相寺)라는 한 가난한 절의 중은, 예불객이 없어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자신의 절과는 달리 근처에 있는 또다른 사찰인 꽌인뎬(觀音殿) 앞에는 늘 예불객들이 피워대는 향 내음이 끊이질 않는걸 보고 극도의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어느날 이 요악한 중의 머릿속에 아주 좋은 ‘꾀’가 떠올랐다. 그 절을 비방하는 소문을 퍼뜨려 예불객들의 발길을 돌리자는 음모를 고안해 낸 것이다.

그 음모란, 꽌인뎬 부근에서 한 석공이 요술을 부려 그 절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훔쳐낸다는 내용이다. 그 석공의 요술에 걸리는 사람은 입고 있는 옷이나 변발 심지어는 사람의 이름을 통해서도 영혼을 빼앗길수 있으며, 한번 영혼을 뺏긴 사람은 죽을수도 있다는 아주 허무맹랑한 미신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그러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될수 있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던 당시의 대다수 중국인들에게 이 소문은 입에서 입을 통해 천리로 퍼져 나갔고 그 과정에서 원래의 소문은 훨씬 더 ‘공포스러운’ 내용으로 가공되어 갔다.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집에서 재앙을 피해 칩거하거나 또는 요술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의심자’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요술의 대공황’속에서 희생양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유랑 걸식하는 거지들이나 떠돌이 승려와 도사들이었다.

소문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광기를 불러왔으며 광기는 급기야 사회 최하층 계급에 대한 잔인한 공격과 사회 전반의 치안공백을 야기시켰다. 자칫 왕조의 붕괴로까지 이어질수 있는 위기의 전조가 나타난 것이다. 1768년 초봄에 시작된 이 ‘요술의 대공황’은 그해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그 위기의 기간동안 청조의 관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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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의 대공황’이 부른 관료체제의 대지진

a 주택단지에 벽에 붙어 있는 사스퇴치 선전물

주택단지에 벽에 붙어 있는 사스퇴치 선전물 ⓒ 박현숙

흥미로운 사실은, 사건이 발생한 후 약 두달동안 베이징의 자금성안에서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허무맹랑한 미신이 만들어낸 ‘작은’ 사건을 보고했다가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기 십상이라고 판단한 지방 관료들이 모종의 담합을 통해 중앙의 황제에게 사건 발생 사실을 은폐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황제가 심어놓은 각종 비밀정보원들을 통해 그 가공할만한 사건의 정황들이 알려지고 이에 분노한 건륭제는 각 지방관료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조속히 밝혀내라는 추상과 같은 엄명을 내리기에 이른다. 그 뒷 얘기는 뻔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황제의 진노에 당황한 관료들이 마침내 ‘요술의 진원지’를 밝혀내기 위해 한바탕 전쟁을 벌이고, 베이징 자금성으로 매일매일 상황속보를 올렸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변발을 통해 영혼을 훔친다는 이 요술의 소문을 들은 건륭제는 이 사건이 필시 만주족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일부 한족 불순분자들의 ‘정치적 음모’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더군다나 최초의 사건 발생지가 한족 사대부들의 중심지라고 할수 있는 중국의 강남(江南)지방이었다는 사실은 건륭제의 이러한 의심을 더욱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한 요악한 중의 질투심이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소문은 이제 청왕조를 전복하려는 정치적 음모론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1768년, 이 ‘요술의 대공황’이 끝난후 청조 관료체제 내부에는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사건 종료후, 초기에 사실을 은폐했던 관료들을 비롯해 대량의 관료들이 면직되거나 처벌을 받았으며 또한 사건의 심문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정치죄’를 뒤집어쓰고 희생양이 되었다.

미국의 중국연구 역사학자 Philip A.Kuhn이 1990년도에 쓴 책 < Soulstealers: the Chinese Sorcery Scare of 1768>은 1768년 청조 건륭제때 일어났던 이 ‘요술의 대공황’을 세가지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첫째, 터무니없는 미신이 만들어낸 소문의 파장이 기층 민간사회에서 왜 ‘광기의 폭동’으로까지 발전했는가이다. 쿤의 해석에 따르면, 이는 당시 사회가 표면적으로는 태평성대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 내부에는 건륭제이후 계속된 인구증가의 압력과 이로인한 민중들의 잠재된 생존경쟁의 압박이 전통적인 미신신앙과 결부되어 사회적 폭동으로까지 연결되었다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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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숙

둘째, 사건이 발생하고도 한참동안 사실을 은폐했던 당시 관료체제 내부의 담합이다. 이것은 중앙과 지방간의 관료 권력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당시 관료체제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모순과 비합리적인 운영의 문제를 지적할수 있다.

셋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이후 건륭제의 대응방식이다. 건륭제는 이 ‘요술의 대공황’을 이용해 관료체제에 대한 감독기능을 강화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황권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권력공고화의 계기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1768년, 중국 강남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퍼져나간 소문의 파장은 이렇듯 청조체제의 전반적인 ‘중추신경’에 일대 교란을 가져오고 자칫 왕조를 전복시킬수 있는 어마어마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된 연후에야 겨우 진정될수 있었다. 후일, 역사가들이 그해 초봄에 벌어진 이 사건을 ‘요술의 대공황’으로 규정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재현되고 있는 ‘요술의 대공황’

그러나, 역사는 재현되고 있다. 신중국 건립이후, 중국에서 벌어진 현대판 ‘요술의 대공황’은 최소한 두 번이나 있었다. 1958-1960년 사이에 일어났던 ‘대약진’ 운동과 1966-1976년까지 중국대륙을 광기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시대적인 배경과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었지만,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역사적인 성격은 1768년판 '요술의 대공황‘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반우경, 반수정주의 투쟁으로 몰아가며 펑더화이(팽덕회)를 비롯해 류샤오치(유소기), 덩샤오핑(등소평)등을 희생시키는 마오쩌뚱(모택동)의 ‘전략적 사고’와 문혁의 대란에서 보여지는 민중들의 광기와 잠재된 분노, 붕괴되는 사회주의 관료체제의 모습등은 가히 현대판 ‘요술의 대공황’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2003년 초봄에도 재현되었다. 공교롭게도 역시, 개혁개방이후 최대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던 시점에서 그것도 중국 정치와 경제의 중심도시인 광동과 베이징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그 의미와 파장이 자못 심각하다고 할수 있다.

다른점이 있다면, 그전의 사건들과는 달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황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보이지 않는 미생물 바이러스에 의해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본질은 마찬가지이다.

a 베이징의 각 아파트마다 외부인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베이징의 각 아파트마다 외부인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 박현숙

1768년, 당시 지방 관료들은 공동의 묵시적인 담합을 통해 황제에게 사실을 은폐했지만 2003년 초봄에 벌어진 ‘사스 대공황’은 반대로 지방과 중앙통치자들이 민중들에게 사실을 은폐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후진타오 주석이 관료들을 향해 ‘어떠한 은폐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경한 선포를 했던걸 보면 그 내부에서 마치 그 옛날 건륭제를 속인것처럼, 현 관료조직들간의 어떠한 권력과 담합구조가 ‘황제의 귀’를 막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반복된 상황은 사건을 초기에 은폐했다는 것과 그로인해 인구 약 1300만명의 공룡도시가 순간적으로 공포에 휩싸이고 공황상태에 빠졌다는것. 또한 민중들의 분노는 비록 과격한 폭동이나 공격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문화대혁명 당시처럼 사회전반에 대한 ‘대비판’으로 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으로 각지에서 100명이 넘는 관료들이 파면되거나 강등당하는등 관료체제 내부에 거대한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것도 그 옛날 ‘요술의 대공황’과 다를바 없는 상황의 전개이다. 후진타오가 과연 건륭제처럼 이 대공황을 계기로 관료체제의 정비와 권력구도의 공고화를 이룰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미생물 바이러스가 야기시킨 뜻하지 않은 사건이 자칫 ‘정치적 위기’로까지 확대될수 있는 불투명한 연결고리의 가능성을 여전히 배제하지 못한다는 점.

그 불투명한 연결고리를 확인시켜 주는 또 하나의 희미한 끈은 이 전대미문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중국정부의 구시대적인 대응방식이다. 21세기판 ‘요술의 대공황’을 수습하려는 중국정부의 대응방식은 여전히 새로운 영웅만들기식 전술과 결사항쟁식의 요란한 선전선동, 인민동원식의 전쟁방식등 아직도 그 옛날에나 써먹던 낡은 ‘요술법’을 고집하고 있다. 중국의 어떤 문화비평가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새로운 적앞에 낡은 병기와 전술”로 맞서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민중들은 인터넷과 휴대전화 메시지등 최첨단 장비를 통해 사회를 풍자하는 각종 사스유머들과 비판들을 행하고 있고 지식인들 사회에서도 총체적인 사회정치적인 개혁 요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중국 인민들은 “새로운 적앞에 새로운 비판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2003년 초봄에 시작된 이 새로운 ‘요술의 대공황’이 과연 어느 방향으로 비화될지 아직은 예측하기 힘든 일이다. 마치, ‘사스’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 바이러스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듯이 이 ‘대공황’ 역시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1768년 봄에 일어난 ‘요술의 대공황’이 암시하고 있는 역사적인 교훈을 기억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대충 지도가 그려질 것이다.

또한 최근 중국인들 사이에 떠돌고 있다는 곡조없는 ‘사스 유행가’에 담긴 관료들에 대한 은유적인 비판 역시 중국정부가 이 위기시대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해학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진탕 먹고 마시는 병 치료할수 없었으나 사스가 치료했네, 공금으로 여행하는 병 치료할수 없었으나 사스가 치료했네. 산더미 같은 공문서와 바다와 같은 회의병 치료할수 없었으나 사스가 치료했네. 상부를 속이고 민중들에게 은폐하는 병 치료할수 없었으나 사스가 치료했네. 매음과 기생질 치료할수 없었으나, 사스가 치료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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