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들은 남산으로 갔다

[역사유산답사 65] 5.16을 맞아 찾은 '남산 중앙방송국'

등록 2003.05.16 05:29수정 2003.05.2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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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3월에는 두 개의 전쟁이 있었다. 미·영군 대 이라크 여론의 전쟁이 하나고, <CNN> 등 미국계 언론과 <알 자지라> 등 아랍권 방송의 전쟁이 나머지 하나다. 사진은 <알 자지라>의 로고.

지난 3월에는 두 개의 전쟁이 있었다. 미·영군 대 이라크 여론의 전쟁이 하나고, 등 미국계 언론과 <알 자지라> 등 아랍권 방송의 전쟁이 나머지 하나다. 사진은 <알 자지라>의 로고. ⓒ 알 자지라

미·영군이 이라크를 침공했던 지난 3월, 세계의 이목은 그 어느 때보다 이라크에 집중되었다. 침략군은 이라크가 숨기고 있는 대량 살상무기를 찾기 위해 침공하는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세상은 그들이 이라크 석유와 중동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침공한다고들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1991년 걸프전 당시와는 달리 침공에 참여하거나 지지의사를 밝힌 국가도 소수에 불과했고, 반전 여론 또한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그러나 미·영군 입장에서는 이미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한 이상, 세계 여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취하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중립적으로 묶어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언론의 활용!


< CNN >이나 <폭스 뉴스> 등은 진실을 호도한다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도 미국 위주의 보도를 일삼았고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그 같은 보도를 한 것이 비단 미국 언론뿐만은 아니었다. 미군 당국은 전 세계 언론사를 상대로 미군 부대와 함께 이동하며 취재할 수 있도록 한 종군기자들을 모집, '미국의 시각'에 입각해 기사를 타전하는 데 일조했다.

a 시청 앞에 박정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일보> 사진부 기자 정범태가 찍은 이 사진 오른쪽에 소령 이낙선과 대위 차지철, 왼쪽에 소령 박종규가 보인다.

시청 앞에 박정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일보> 사진부 기자 정범태가 찍은 이 사진 오른쪽에 소령 이낙선과 대위 차지철, 왼쪽에 소령 박종규가 보인다.

언론, 또 하나의 전쟁

그러나 이번 전쟁은 지난 91년 걸프전과는 달랐다. '충격과 공포'야 어떤 전쟁이든 비슷하겠지만 이번엔 언론들 사이의 전쟁도 미사일 전쟁 못지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가장 큰 특징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방적인 시각만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도 어느 정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알 자지라>나 < 아부다비TV >, <알 아라비야> 등 아랍계 언론의 활약이 그 어느 때보다 돋보였는데, 심지어 "<알 자지라>가 < CNN >을 물 먹였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라고 하니 그 파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a 지난 2001년 4월 24일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공동대표 곽태영 등)가 문래공원에 있던 박정희의 동상을 쓰러뜨리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 2001년 4월 24일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공동대표 곽태영 등)가 문래공원에 있던 박정희의 동상을 쓰러뜨리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미국의 입장에서는 분명 긴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상도 못했던 반전 여론에 놀라고 계획과는 달리 지지부진한 진격 속도에 또 한번 놀라고 있던 참인데, 생전 거들떠보지도 않던 방송사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의도와는 다른 보도를 한다니! 그나마 <알 자지라>나 < 아부다비TV > 등은 이라크와 직접 연관이 없다지만 <이라크 국영방송>의 보도를 인용해 ‘악의 축’ 사담 후세인과 전 공보장관 알 사하프의 발언을 연일 내보내고 있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원활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차질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미국은 자신들의 장기를 200% 발휘,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면서까지 <이라크 국영방송>과 이라크 공보부 건물에 폭탄을 쏟아 붇는다. 때는 전쟁 닷새 만인 2003년 3월 25일.


왜 미국이 이 두 건물들을 폭격했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라크 주민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무혈 입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미군, 그러한 의도가 빗나간 원인 중 중요한 부분에 이라크 공보부를 위시한 <이라크 국영방송>의 선무(宣撫)가 있었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단 시간 내에 최고의 선전 효과를 낼 수 있는 것, 바로 텔레비전 방송이 갖는 위력이다.

한강을 건넌 박정희, 남산으로 향하다


방송이 갖는 힘이 이러할진데 비단 이런 일이 바그다드에서만 일어날까? 머나먼 이국 땅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란 것쯤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물론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쟁 상황은 아니었다지만 그에 못지않을 정도로 긴박했던 순간, 바로 육군 소장 박정희(朴正熙)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다.

한강 인도교를 걸어서 건넌 박정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육군본부나 서울시청, 경무대(현 청와대)도 아닌 남산 중앙방송국이었다. 왜 남산 중앙방송국을 가장 먼저 점령하려 했는지 그 의도는 뻔해 보인다.

그것은 미·영군이 왜 이라크 공보부와 <이라크 국영방송> 건물을 폭격했는지에 대한 정답과 같다. 먼저 ‘마이크’를 쥐어야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당시 쿠데타군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a 1957년 세워진 남산 중앙방송국 건물이다. 지금은 (사)서울산업진흥재단이 입주해 있다.

1957년 세워진 남산 중앙방송국 건물이다. 지금은 (사)서울산업진흥재단이 입주해 있다. ⓒ 권기봉

그러나 당시 박정희는 남산 중앙방송국에 도착한 즉시 ‘혁명 공약’ 발표를 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33사단이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정보 누설로 이 부대의 출동이 늦어져 새벽 4시 30분 박정희가 도착할 때까지도 남산 중앙방송국은 한산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혁명 공양 등 방송 원고를 들고 나타나기로 했던 김종필(金鍾泌)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애초 출동하기로 한 부대들이 대부분 발이 묶여 있는 등 1초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당시 상황에서 박정희가 계속 남산에 머무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육군정보학교장이던 준장 한웅진(韓雄震)에게 남산 중앙방송국 점령을 맡기고 4시 40분 출발, 직접 안국동 광명인쇄소에 가서 혁명 공약 등을 담은 방송 원고를 갖고 김종필 등과 함께 다시 남산 중앙방송국으로 돌아온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

이른 당직 중이던 아나운서 박종세(朴鍾世)와 담을 넘어 도망가려던 방송 기술자들을 모아 2층 주방송실에서 혁명 공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행진곡이 끝나자 박종세가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a 중앙방송국 건물의 왼쪽 부분으로, 겉모습은 5·16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

중앙방송국 건물의 왼쪽 부분으로, 겉모습은 5·16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 ⓒ 권기봉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이날 라디오 방송에서 눈에 띠는 부분은 쿠데타군이 내걸었던 6개조의 혁명공약이인데, 다음과 같다.


a 중앙방송국 건물의 오른쪽 부분.

중앙방송국 건물의 오른쪽 부분. ⓒ 권기봉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로 끝을 맺은 이 혁명공약은 김종필이 초안을 쓰고 박정희가 교열을 본 것이라 알려져 있다.

“역사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
5·16을 직접 본 박병길씨

▲ 5·16을 직접 본 박병길씨.
ⓒ권기봉

남산 중앙방송국 건물 맞은편의 기독교TV 건물 관리인으로 있는 박병길(68)씨는 한국 전쟁 이전부터 이 일대에 살아오면서, 직접 5·16을 겪은 이 중 하나다.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난 5·16이 터졌을 때 대방동에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쿠데타가 터졌다는 거야. 그래서 얼른 시청으로 달려가 봤지.”그는 당시 서울시청으로 오는 길목 곳곳에 군인들의 간이 초소가 있었노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이어서“그런데 당시엔 나라가 하도 혼란스러워서 그랬는지 쿠데타를 좋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지. 한 노인은 우리나라도 이집트 나세르처럼 군인이 나서서 독재를 해야 된다고 일장 연설을 하기도 했어. 역사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면서 말이야.”라고 말했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일반인들 사이에는, 특히 노인들 중에는 5·16을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라 부르면서 호의적으로 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는 일반적인 사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사회상이 하도 불안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시 떠돌았던 소문도 잊지 않고 이야기한다.

“아니 그런데 여기 이 근처에 육참총장이란 해참총장이 살았는데, 그걸 지키는 초소도 분명 있었거든. 당시엔 2차선이라고 하긴 했지만 지프차가 지나가면 걸리기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박정희 차량은 그냥 지나갔다고 하더군. 무슨 모종의 이야기가 오고 갔었던 건지 말이야.”

박씨는 육군 및 해군 참모총장 관사가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당시 어떻게 박정희가 탄 차량이 검문도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표했다. 물론 정확한 확인이 쉽지 않은 일이긴 하나, 장도영 휘하의 쿠데타 저지군이 1개 중대 정도 밖에 없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사전에 논의가 이루어졌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해볼 수 있다. / 권기봉

남산 중앙방송국을 점령하기는 했으나…

남산 중앙방송국을 점령해 혁명 공약을 낭독함으로써 기선을 잡은 쿠데타군.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권을 장악, 대한민국 역사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부상한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 미디어 시설 폭격 후에 비교적 쉽게 전투를 계속 할 수 있었지만 점령 이후 적지 않은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박정희의 5·16도 이후의 과정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물론 쿠데타 초기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는 했으나 이후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이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혁명인지, 아니면 그저 군부가 일어선 쿠데타인지에 대한 판단이 어느 정도 가능해 진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대승적인 의미로 볼 때 졌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5·16 직전 이승만과 자유당의 장기 집권과 독재, 그 이후 찾아온 무정부적 혼란과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의 무능력함에서 군부 쿠데타의 필요성과 의의를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당시 제3세계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유행으로 느껴질 만큼 혼돈의 연속이었으니까. 게다가 어떤 이들은 1959년 9월 미 의회에 제출된 ‘콜론 보고서’에 근거, 이미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군부 쿠데타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5·16 이후 들어선 군사정권의 모습을 보건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기대되는 정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에 대해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득권의 연장이든 말든 혁명이든 말든 4·19 이후의 무질서를 바로잡는 데 일조하지 않았느냐” 혹은 “경제 개발을 통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지 않았느냐”하는 등의 주장이다. 물론 당시 군부가 정치 상황을 판단하기를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발전 가능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안보상의 위협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장에 동조하기란 쉽지 않다. 5·16은 그네들이 주장하는 혁명이 아니라 군부 쿠데타에 더 가깝다는 말인데 이유인즉슨 이렇다. 혁명이라 함은 본디 민중이 사회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인 데 반해 5·16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a KBS TV가 있었던 건물로, 중앙방송국 건물 맞은편에 있다.

KBS TV가 있었던 건물로, 중앙방송국 건물 맞은편에 있다. ⓒ 권기봉

당시 대한민국 군부는 한 해 국가예산의 40% 이상을 배정받는 실정이었고, 매년 미국으로부터 약 4억 달러 이상의 무기를 비롯한 군수 물자를 지원 받는 등 혜택을 받는 계층에 속했다. 또한 당시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경제·사회적 모순들을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심화시켰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들어선 민주당 정부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등과 폭력 지상주의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인정(人情) 정치는 이후 한국 사회의 정신적 성숙을 가로막고 온갖 부정부패에 대해 무신경해지는 최음제 역할을 했다.

또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하리라던 박정희 정권은 오히려 구습에 물든 정치인들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받아들이는 등 반개혁적이고 반동적인 양상을 보였다.

심지어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다”고 선언했으나,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을 찾지 못했는지 2년간의 군정 후 직접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가 바로 박정희와 5·16으로 들어선 군사정권 아니던가.

a 쿠데타 직후 남대문 경찰서 앞에 걸린 공고문으로, “국민들은 생업에 종사하시라”고 말하고 있다.

쿠데타 직후 남대문 경찰서 앞에 걸린 공고문으로, “국민들은 생업에 종사하시라”고 말하고 있다. ⓒ 권기봉

중앙방송국은 남산에 있었다.

봄날 같지 않은 날씨에 찾은 남산. 1957년 법제가 미비하던 시기에 무허가 건물로 들어선 남산 중턱 예장동 4번지의 중앙방송국 건물. 지난 1973년 한국방송공사(KBS)가 설립되어 1976년 여의도로 옮겨갈 때까지 전국으로 전파를 쏘아 보냈던 방송국인데, 지금은 내부수리를 했기 때문인지 산뜻해 보인다. 그러나 건물 외형은 아직도 과거의 모습이 남아 흘러간 옛 영욕의 시절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는 듯 하다.

다만 이것도 관심을 가져야 보이는 법. 표지 하나 없어 이곳이 이전에 중앙방송국이 있던 건물임을 아는 이 하나 없고, 박정희가 혁명공약을 낭독했던 곳으로 알고 있는 이 역시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남산 케이블카를 타러 올라가는 사람들과 오랜만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아주머니, 등교를 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학생들만이 오갈 뿐.

오는 5월 16일(금)은 1961년 일단의 무장 병력과 한강을 넘어 서울 시내로 진입한 박정희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지 꼭 42년째 되는 날이다. 중앙청은 온데 간데없고 청와대는 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 되어버린 지금, 남산에 올라 책 속에서만 보아왔던 5·16과 박정희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a 중앙방송국에서 명동으로 내려오는 길목으로, 횡단보도가 보이는 곳에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의 관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쿠데타군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초소를 통과, 100m 위의 중앙방송국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중앙방송국에서 명동으로 내려오는 길목으로, 횡단보도가 보이는 곳에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의 관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쿠데타군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초소를 통과, 100m 위의 중앙방송국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 권기봉


‘남산 중앙방송국' 찾아가는 길
명동의 번화함을 잠시 뒤로 하고...

▲ 남산 중앙방송국 찾아가는 길
ⓒ권기봉

이번에도 역시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하자.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가자. 나가자마자 뒤쪽을 보면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길로 곧장 올라가자.

대한적십자사와 서울예술대학 남산교육원을 지나 올라가면 기독교TV 건물을 볼 수 있는데, 그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이 남산 중앙방송국이 있던 건물이다. 지금은 (사)서울산업진흥재단이 입주해 있다.

지도의 아래쪽 빨간색 건물이 남산 중앙방송국 건물이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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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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