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문대 시간 강사의 죽음 앞에서

2003년 인문학 단상

등록 2003.06.03 02:12수정 2003.06.03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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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친구와 저녁밥을 먹다가 어느 인문대 시간강사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언젠가는 한번쯤 일어날 법한 일이 현실화되었다는 그 정도의 느낌이라고 할까. 특별히 고인의 죽음이 애석하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정부나 대학의 정책 속에서 항상 뒷전으로 밀리는 인문학의 위상에 대해 자조하거나 당국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이후 모 신문 독자란을 훑어보았다. 이런 류의 사건이 터질 때면 그렇듯이 서울대를 나오지 못한 사람들, 월수 200만원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조소 어린 독설이 쏟아진다. 그 한편으로는 현재 대학의 시간강사 운용 방침을 비롯한 정부와 대학의 인문학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희미하게나마 들린다.

그리고 중간적 입장에서 고인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일부의 독설기 어린 냉소에 대해 이성적인 비판의 논점을 조목 조목 요약하는 차분한 목소리도 들린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만큼 목소리도 다양하다. 거기에는 일말의 진실도 들어 있고 대학의 절망적 현실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방외자적인 편견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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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전통과 현대>의 표지 ⓒ 해당 저자

학위의 유무, 결혼 유무를 떠나 고인과 나는 동업자다. 어제 같이 밥을 먹은 친구도 동업자고, 내 일상을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동업자다. 모두 고인과 비슷하거나 조금 젊은 동업자들이다. 나는 고인에 비하면 삶에 대해 조금 더 희망을 가진 편에 속한다. 그 희망이란 흔히 내뱉을 수 있는 희망이라는 단어일 뿐이다.

앞으로의 인생에 어떤 덫이 놓여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 그저 최소 생계비마저 되지 않는 수입을 쪼개서 책을 사고 남들이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거나 편안한 자세로 TV를 보고 잠이 주는 안락에 빠져들 시간을 지나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며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다.

어느 독자께서 말씀하셨듯이 고인에게 공부하라고 떠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고인은 남들이 고시 준비하고 멋진 사회 초년을 시작할 때도 공부가 좋아 대학에 남아 공부를 했을 터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내 주변의 동업자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자기 선택에 대해 끝까지 책임져야 하리라는 각오쯤은 공부를 시작할 때 누구나 하게 된다. 중도에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요즘 들어 부쩍 늘었다. 그리고 돈 안되고 결혼 시장에서도 퇴짜맞기 십상인 학생의 길로는 애당초 들어가지 않으려는 젊음들로 넘쳐 난다.

오히려 대학원에 남아 있는 사람이 병신 취급받는다. 그들은 생활의 여기로 짬짬이 책장이나 넘기는 일이 아니라 산더미같은 종이뭉치 속에 인생을 파묻고 오직 읽고 쓰기를 통한 생의 의미 찾기에 일생을 건 사람들이다.


물론 개중에는 지식과 학벌을 하나의 권력 쌓기를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만으로 대학의 지식인을 평가하려는 세인들의 마음 씀씀이를 접할 때마다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진정 학문적 열정에 사로잡혀 자기 분야에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들은 TV에 나와서 이름이나 얼굴을 팔고 다닐 시간조차 없다.

물론 시간 강사들은 언젠가는 대학에서 어엿한 자리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일차적 목표라면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같이 인사 적체가 심한 상황에서는 대학에서 자리 하나 얻으려면 40세 가까이는 되어야 가능하다. 남들이 취직할 때부터 비교해봐도 10여 년 이상을 생계 불안정의 공포에 시달리며 필사적으로 이리 저리 뛰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이 마흔에 대학에 자리를 얻어도 그동안의 기회비용을 따지게 되고, 그동안의 노력을 감안한다면 현재 대학에서 받는 돈이 그리 많은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학 교수직과 월급에 혈안이 되어 공부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런 욕망이라면 왜 굳이 취업도 더딘 대학에 목매고 있겠는가. 그나마 교수 자리도 계약직으로 전환되는 추세이고 보니 한 번 자리 잡아 정년까지 간다는 예전의 불패 신화는 이제 사어에 지나지 않는다.

고인의 경우 공부하면서 일찍 결혼한 듯하다. 인문학 공부하면서 결혼을 꿈꾼다는 것은 만용에 가깝다. 그리고 만약 아이라도 낳게 된다면 이것은 자살과도 같은 공포를 안겨 준다. 애 하나 밑으로 들어가는 돈이 어디 한두푼인가. 고인이 카드 빛에 시달리게 된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게 된다. 그런 탓인지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찍 결혼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일상을 같이 하는 동업자들 중에는 미혼자가 2/3이다. 젋은 나이의 인문학도에게 결혼과 아이는 사회적 자살에 가깝다.

인문학의 가치를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느끼지 못한다. 인문학이라고 그러면 공부 좋아하는 백면서생들의 자위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복제소를 개발한다든가 하는 가시적 성과로 나타나지 않는 게 인문학의 특성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구태를 벗고 인문학을 상품화하려는 시도도 일어나고 있다. 최근 몇 년 간의 역사학은 인문학 중에서도 상품화에 성공한 실례이다. 그런 흐름을 타고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수준은 한 차원 높아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역사학이 상품화에 성공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밑바탕에 선학들의 지난하고 치열한 고투가 있었음을 사람들은 쉽사리 망각하는 듯하다. 인문학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인문학은 결코 무익한 일이 아니다. 지금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 중 상당수가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학문과 연구에 매진한 사람들의 성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한번쯤 생각해 봄직도 하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정부나 대학의 무관심도 무관심이지만 세인들의 편견 섞인 비난에 더 큰 좌절감을 느낀다. 자기 스스로 얻는 만족감이 공부의 일차적인 동기이겠지만, 사회적 가치 평가나 공감대 역시 무시 못할 요소라고 생각된다. 인문학 무관심을 넘어 인문학 경시 풍조가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의식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에서 사는 인문학도는 좌절할 뿐이다. 적어도 사회 구성원이 자기가 선택한 일에서 만족을 얻고 생계 문제도 어느 선에서 해결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은 이기주의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을까.

물론 나는 고인의 자살에 아쉬움을 느낀다. 남은 부인과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힘들어도 같이 부대껴가야 하지 않았을까. 부인과 아이의 절망과 분노는 누가 책임져야 할까. 누구든 자기가 처한 고유한 상황 속에서 절망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게 인생일 터다. 그렇다고 고인의 죽음을 매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고인의 죽음 뒤에 남겨진 자로서 내가 바라는 것은 그 분의 죽음이 시스템의 변화와 인식의 변화를 생각해보는 자성의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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