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파에 휘둘린 삶, 그렇게 17년은 갔다

[문화유산답사 67] 단종의 애환을 찾아① - 영월 ‘청령포’

등록 2003.06.03 16:24수정 2003.06.04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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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조선의 6대 왕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 청령포. 삼면은 물로, 나머지 한쪽은 험한 봉우리와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조선의 6대 왕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 청령포. 삼면은 물로, 나머지 한쪽은 험한 봉우리와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 권기봉

"이러다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
대통령 노무현이 지난 5월 21일 '5.18행사 추진위원회' 간부들을 접견하면서 했다는 말이다. 이후 보수 언론들이 나서서 ‘어디 한번 잘~ 걸렸다’는 듯 펜 끝을 세웠지만 그래도 노무현은 행복한 사람이다. 자기가 원해 정치를 했고, 자기가 원해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고, 또 역전극을 펼치면서까지 당선되었으니 말이다.

살다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둘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건 자신이 하고 싶어 나섰다가 실패하거나 버림받는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경우다. 자신의 의지나 계획, 희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난, 아니 아예 의식조차 못하고 있던 것에 의해 결정되는 삶. 이처럼 어이없는 경우가 또 어디 있을까? 주변 인물에 의해 그리고 주변 상황에 휘둘린 삶은 얼마나 비참한가!


a 청령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만 한다. 지금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던 당시보다 수량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청령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만 한다. 지금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던 당시보다 수량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 권기봉

12세에 왕위에 올라 17세에 죽임을 당한 왕, 단종

단종(端宗). 한 나라의 절대지존이라 할 왕이었지만, 그가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른바 단종은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게 아니라, 이른바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수동적인 삶, 휘둘리는 삶이었던 것이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 성장해야 했던 세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아들인 조선의 6대 왕 단종은, 그래도 세종이 성삼문이나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그를 잘 보필하라고 일렀기에 어느 정도 권좌가 든든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아버지인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만인 1452년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세상 물정을 알 턱이 없는 12살 소년이 권력 최고봉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조차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지만.

a 청령포의 소나무들은 대개 단종이 머물렀던 거처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누구는 단종의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이라고 하나 북풍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끔은 과학을 젖혀두고 전설을 믿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청령포의 소나무들은 대개 단종이 머물렀던 거처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누구는 단종의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이라고 하나 북풍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끔은 과학을 젖혀두고 전설을 믿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 권기봉

단종이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1455년. 어린 단종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판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그의 첫째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이후 세조)이 한명회와 정인지 등과 결탁,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때 좌의정 김종서 등은 죽임을 당하고 단종도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上王)으로 나앉는다.

이듬해 성삼문과 박팽년, 하위지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은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사전에 발각,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강원도 영월 청령포(淸泠浦)로 유배 보낸다.


단종이 서울을 떠난 것은 세조 2년인 1456년 6월 20일이었다. 지금이야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면 영월까지 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지만, 543년 전의 6월에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열흘 가까이 50여명의 군사 호위를 받으며 5백여 리를 걸어야했던 16살의 단종. 과연 그는 왜 이 먼 길을 걸어야 했는지, 왜 아내와 친지를 떠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을까?

a 단종이 머물렀던 것으로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담장 옆의 소나무는 거의 쓰러질 듯 기울어 자라고 있다.

단종이 머물렀던 것으로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담장 옆의 소나무는 거의 쓰러질 듯 기울어 자라고 있다. ⓒ 권기봉

알카트로스가 따로 없구나


어린 단종이 느꼈을 슬픔을 생각하며 청령포를 찾았다. 청령포. 경치 하나만은 일품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운. 햇살이 쨍쨍해 그랬지 만약 비라도 내리거나 구름이라도 두껍게 끼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을 것만 같은 느낌, 청령포는 그랬다.

단종이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2달 정도 유배 생활을 했던 청령포는 중죄인들의 감옥으로 쓰였다던 미국 알카트로스(Alcatraz)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알카트로스가 사면이 모두 바다로 막혀있는 반면, 청령포는 삼 면은 깊은 물길이요 나머지 한 면이 66봉의 험준한 산과 절벽이라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청령포 역시 알카트로스 못지않게 웬만해선 빠져나갈 수 없는 고도(孤島)!

청령포. 지금이야 수량이 많이 줄었다지만 당시에는 배를 타지 않으면 건너기 힘든 깊은 물이었다고 한다. 또 뒷산의 숲도 지금보다 훨씬 울창했다고 한다. 그냥 자연경관으로만 따진다면야 이런 절경이 없겠지만 어디 단종을 떼어두고 청령포를 볼 수 있을까.

a 금표비(좌)와 단묘재본부시유지비. 각각 왕이 있으니 접근을 금하며, 단조가 머물렀던 곳을 의미하는 비석들이다.

금표비(좌)와 단묘재본부시유지비. 각각 왕이 있으니 접근을 금하며, 단조가 머물렀던 곳을 의미하는 비석들이다. ⓒ 권기봉

청령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만 한다. 서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배에서 내려 햇볕에 달구어진 자갈밭을 지나면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다지 울창하지는 않다. 그 안에 단종이 머물렀던 집과 단종이 이곳에 머물렀음을 말해주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비가 있다. 이 비는 영조 39년인 1763년 어명에 의해 원주 감영에서 세운 것이라 전한다. 또 소나무 숲 한쪽에는 ‘청령포금표(淸泠浦禁標)’라고 씌어진 비가 한 기 서있다. 왕이 있는 곳이니 동서 3백 척, 남북 4백90 척 내에는 얼씬도 말라는 얘기다. 왕 같지도 않은 왕 생활을 보낸 것 치고는 지나친 고독의 강요일 뿐. 이 숲 속에는 수령 6백 년으로 추정된다는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소나무도 한 그루 있다.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觀) 들었기에(音) 관음송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소나무라 한다.

a 단종의 애달픈 삶을 듣고 보았다는 소나무 ‘관음송’. 단종에 이 나무에 올라 놀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49호.

단종의 애달픈 삶을 듣고 보았다는 소나무 ‘관음송’. 단종에 이 나무에 올라 놀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49호. ⓒ 권기봉

청령포 오른쪽에는 높이 80여 미터의 절벽 ‘노산대(魯山臺)’가 있다. 해질 무렵이면 단종이 여기에 올라 서울 쪽을 바라보고 시름에 잠겼다 하는데, 자신의 알 수 없는 처지에 낙담하고 아내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여기서 온 길을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오르면 중턱쯤 되는 곳에 조약돌로 쌓은 탑이 하나 나온다. 후세 사람들이 망향탑(望鄕塔)이라 이름 붙인 이것은, 단종이 이곳 청령포에서 약 두 달간 지내면서 매일같이 뒷산에 올라 서울을 그리며 쌓은 것이라 전한다. 허물어졌던 것을 1974년 다시 쌓은 것이다.

세파에 휘둘린 삶, 17년은 그렇게 갔다

단종은 이곳 청령포에서 두 달 정도 지내다가 바로 영월 읍내의 객사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다. 홍수 때문에 물이 불어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종은 그곳으로 가 얼마 되지 않아 죽임을 당한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 세파에 휘둘린 삶은 그렇게 허망하게 간 것이다.

자신이 왕이 되고자 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우리야 알 수 없지만,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생사(生死)는 차치하고서라도 단종의 삶 역시 그의 통제 밖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그 어떤 권한도 박탈당한 채로 17년의 감옥 같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단종의 사인(死因)을 두고 분분한 전설만을 남긴 채.

a 후세 사람들이 망향탑이라 이름 붙인 이것은, 단종이 이곳 청령포에서 약 두 달간 지내면서 매일같이 뒷산에 올라 서울을 그리며 쌓은 것이라 전한다. 허물어졌던 것을 1974년 영월군수 김명한(金明漢)이 나서서 다시 쌓은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망향탑이라 이름 붙인 이것은, 단종이 이곳 청령포에서 약 두 달간 지내면서 매일같이 뒷산에 올라 서울을 그리며 쌓은 것이라 전한다. 허물어졌던 것을 1974년 영월군수 김명한(金明漢)이 나서서 다시 쌓은 것이다. ⓒ 권기봉

사람의 생사를 그 자신이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지만 단종의 경우는 남다른 데가 있다. 조선 왕실의 직계 자손으로 태어나 왕권과 신권이 대립하는 틈바구니 속과 권력을 쟁취하려는 어른들의 다툼에서 어린 단종이 무참히 짓밟힌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 왕실의 직계라는 명분상의 정당성 말고는 단종이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단종을 보며 우리는 그래도 행복하다고 느껴야 하는 것일까? 너무나 잔인한 말인지는 모르나 그래도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다는 것,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어쨌거나 되던 안 되던 시도는 해볼 수 있다는 것. 내 삶에 내가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에 겨워해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a 높이 80여 미터의 절벽 ‘노산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 단종은 해질 무렵이면 이곳에 올라 시름에 잠겼다고 한다. 처절한 삶에 슬퍼하며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높이 80여 미터의 절벽 ‘노산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 단종은 해질 무렵이면 이곳에 올라 시름에 잠겼다고 한다. 처절한 삶에 슬퍼하며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 권기봉

a 청령포에서 청령포 밖을 본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나라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가든’뿐. 지금은 철로가 청령포를 지나고 있어 단종이 머무를 당시의 정적과 고독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청령포에서 청령포 밖을 본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나라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가든’뿐. 지금은 철로가 청령포를 지나고 있어 단종이 머무를 당시의 정적과 고독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 권기봉



단종이 걸어간 5백리 길, 2시간 30분에 가기
청령포 가는 방법

▲ 파란 점이 청령포 입구로, 배를 타고 철령포(붉은 점)으로 갈 수 있다.
ⓒ권기봉

청령포를 갈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다소 불편하다. 그러나 그냥 두 발만으로 여행 다니는 이가 많은 만큼 대중교통도 소개한다.

서울을 기준으로 했을 때 동서울터미널이나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영월로 가는 버스가 있다. 약 2시간 30분 정도 걸리나, 주말에는 고속도로가 밀린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기차는 청량리역에서 태백성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영월 읍내에서 청령포까지는 시내버스로 약 10분 정도 걸리며, 거의 한 시간마다 버스가 있다. 만약 택시를 탄다면 5분이면 닿을 수 있고, 청령포에 도착하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입장료에 뱃삯도 포함되어 있는데, 성인의 경우 1천원이다.

한편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중앙고속도로 서제천IC에서 나와 38번 국도를 타면 영월에 닿는다. 영월읍내 네거리에서 문곡으로 향하는 31번 국도를 2km 남짓 가다가 좌회전해 1.2km 정도 더 가면 청령포 입구에 도착한다. 물론 주차비를 지불해야 한다. (지도 참조)

더 자세한 문의는 청령포 관리사무소(033-370-2620)나 영월군청 문화관광과(033-370-2544)로 하면 된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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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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