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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에 쏘인 것을 따끔하다고 표현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맙시다. 남양주 월문리에서0607 ⓒ 김규환
벌에 쏘여 죽을 뻔한 적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내가 한 번은 친구가 당한 일이다. 친구가 쏘였을 때 40여 방 쏘였지만 그 때는 말짱했다. 하지만 친구는 그 때 120방 넘게 쏘여 일주일 간 바깥출입을 못했다. 내가 당한 일은 버찌가 한창 익던 철이니 아직 이르다.
고등학교 졸업한 뒤 직장 생활하다 내려온 친구와 학교 다니던 나는 군대 가려고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어릴 적 이름이 성호였던 승호는 그 때도 여전히 집에서 성호라 불렸다. 집안 일을 중심으로 일을 거들던 친구와는 달리 나는 근 20여 일을 이 집 저 집 다니며 모를 지게로 져 날라 논에 고루 던져주는 모쟁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나라도 품앗이를 해야 우리 집 모내기를 할 수 있었기에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모쟁이가 얼마나 힘들면 어른들이 우스개 소리로 ‘장가가기 글렀다’고 놀리던 고된 일이다.
이래저래 친구와 나는 바빠서 막걸리 한 잔 나눈 기억이 없다. 그래서 ‘술이나 한 잔 마시자’며 꼬드긴 것도 나였다. 모내기가 끝나갈 무렵 대낮이었다. 일을 나가지 않아도 될 즈음 친구를 불러내 담배와 술 파는 옆 동네 학교마을 점방을 향해 걸어갔다. 저 멀리 아직 모내기가 끝나지 않은 논에서 어머니들 열댓 명 모여 일을 하고 있다.
학교가 있던 곳도 같은 마을이지만 나름대로 널찍한 논들이 펼쳐 있고 직선거리로는 800여 미터가 안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다. 하지만 구불구불하기가 양장굴곡(羊腸屈曲)에 버금 갈 정도로 심하여 경운기도 굽은 길 두어 군데서는 몇 차례 씨름을 하고 나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니던 신작로가 이 길이다.
이렇게 까지 된 데는 옛 길을 따라 양쪽을 조금 씩 떼 내서 넓혔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2km나 되는 먼 길로 둔갑하여 예전보다 외려 더 먼길을 만들었으므로 여름 한 철 빼고는 가로질러 다니라고 만들어 놓은 길이었다.
그래도 대체로 그 길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지형은 평지에 가깝기는 하지만 오히려 돌부리에 체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갈 수도 없는 험한 길이다. 논과 길의 구분이 거의 없으니 고무신 신고 가지 않으면 물에 첨벙첨벙 빠져 중고등학교 때는 운동화를 매일 적시다 시피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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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꽃을 감똘개라 했던 것 같습니다. 감나무는 성한 가지도 잘 부러지니 조심하세요. ⓒ 김규환
우린 그런 길을 까만 고무신이 아닌 아버지의 흰 고무신으로 업그레이드 시켜 오후 3시쯤 발을 질질 끌고 학교 쪽으로 갔다. 마을 입구 80여 미터 근방에 다다랐을 때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똑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응? 정국이 수상하더니 혹 전쟁 일어난 것 아닌가?’
늘상 백아산 (*)‘몰랭이’에 낙하산이 뜨고 내리는 걸 보아왔던 우리는 분명히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야, 뭔소리냐?”
“가만 있어 봐봐”
“...”
“...”
“들리냐?”
“응~”
“분명히 뭔가 ‘웅~웅~” 하는데?”
“글게 말이다. 멀리서 비행기 가는 소리 같기도 한데.”
“백아산 상봉인가?” “
“(*)‘감낭구’ 쪽에서 나는 소리 같다.”
“그래! 맞다. 감나무에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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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미터는 족히 되었으니 얼마나 높았겠습니까? 이 정도는 되는 큰 나무였습니다. 밤꽃 피면 벌이 참 좋아합니다. 0607 남양주 월문리 ⓒ 김규환
차츰 다가가 보니 학교 뒤쪽 담벼락에 심어져 12m 쯤 되는 거목(巨木)이 된 해섭이네 감나무에 벌이 “윙윙”거리고 있었다. 수많은 벌떼가 나무 꼭대기에 붙어 나풀거리고 있었다.
“야, 규환아! 벌인갑다.”
“뭐야 벌이라구? 벌 한 통이 얼만디...”
“집 나온 벌인께 주워 가는 사람이 임자 아니냐?”
“그니까 어쩌자고야?”
“양지 우리 마을까지 가믄 (*)‘폴새’ 도망가불 것인께 새터마을 성모씨 댁에 가서 ‘멍덕’을 갖고오자.”
“알았어. 그렇게 하자.”
둘다 나무 타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선수들인지라 벌을 쓸어 담을 도구만 마련되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집에 가보니 마침 아무도 없었다. 어른들이 하던 대로 따라서 하면 되는 것이다. 둘은 서둘러 마성모 씨 댁으로 갔다. 뒤뜰까지 뒤져도 (*)‘멍덕’은 보이지 않고 확독 근처 기둥에 여자들이 멋 부리고 살갗 타는 걸 막기 위해 쓰고 다니는 둥그렇고 챙이 넓은 붉은 모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야, 안되겄다야~. 이거라도 갖고 가자.”
“글자.”
집 나온 벌은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언제고 다시 자리를 옮겨 지네들 둥지 틀기 적당한 곳으로 이동할지 모르니 한시도 늦출 수 없어 급히 가서 달래 주어야 한다.
턱 끈이 있는 모자를 챙기고 뛰어 가면서 쑥쑥 자란 쑥을 두어 줌 길게 꺾다시피 뜯어서 도착해보니 아직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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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망초에도 벌이 꿀을 따러 나왔습니다. 0607 남양주 월문리 ⓒ 김규환
급한 가운데 차근차근 준비했다. 담배에 멍덕으로 쓸 모자 그리고 쑥. 먼저 내가 올라가기로 했다. 10미터 이상 꼭대기에 한 바가지 이상이나 되는 벌이 덩캐덩캐 몰려 있었다. ‘그래 요것만 쓸어 담으면 몇 년 간 로얄제리 부터 꿀은 내 것이란 말야~’ 즐거운 상상을 하며 당시 한 갑에 100원 하던 ‘환희’(영만이라는 친구와 서울서 한 갑을 저녁 내 같이 나눠 피고 그 다음날 목이 막혀 어쩔 줄 몰라했던 대단한 담배) 한 까치를 입에 물고 뻐끔뻐끔 연기를 내가며 어른들이 하던 대로 “음음음음~” “음음음음~” 굵고 낮은 소리를 내가며 쑥으로 살살 쓸어 담았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띠얏!”
“왜?”
“벌이 쏴부렀어야~”
“몇 마리나?”
“서너 마리 되는 것 같애. 후~후~ 벌써 얼럴하다.”
“글면 내롸라 내가 올라 갈랑게.”
“잠깐 만 잘 걸쳐놓고 내려갈게~”
벌 한 통 옆에서 나눈 나직하고 조용했다. 내가 내려오고 그 친구가 올라갔다. 벌에 쏘이자 다시 친구가 내려왔다. 감나무를 오르락내리락 번갈아 가며 쏘이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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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꽃은 꿀풀인데 벌보다도 시골 아이들이 더 좋아합니다. 꽃을 쏘옥 빼서 쪽 빨아 먹으면 달큼 합니다. 0607 남양주 월문리 ⓒ 김규환
담배를 물고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 씁쓸한 ‘환희’도 떨어지자 덩어리에 끼지 못한 벌이 몸 주위를 더 자주 그것도 훨씬 더 많은 숫자가 뱅뱅 돌았다.
내가 세 번 째 올라갔을 때 친구에게 다짐을 했다.
“승호야! 이번엔 반드시 여왕벌을 그 곳에 쓸어 담아올게. 알았냐? 이 성아가 하는 걸 잘 봐라 알았지?”
“알았어야. 조심히 올라갔다와~.”
그 전까지는 한 무더기였던 벌이 모자에 쓸어 담느라 쑥으로 몇 번을 건드려서 그런지 주먹만한 분량의 무리가 따로 떨어져서 길게 대롱대롱 매달려 언제고 떨어져 일을 칠 위험천만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때였다. 서른 마리는 족히 되는 벌이 툭 떨어져 내 온 몸을 파고들었다. 다시 모자를 걸쳐놓고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야아~ 승호야! 도저히 안되겠다. 포기하고 그냥 가자. 이러다가 큰 일 나겠다. 어쩔래?”
“가만 있어봐야. 마지막으로 내가 올라갔다 올게.”
“적당히 하고 가자. 도저히 못 참겠다니까...”
“알았어. 딱 한 번 만이다.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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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이 한 덩어리가 떨어졌으니 얼마나 놀랬겠어요. 벌에 쏘이면 일단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이기는 하지만 그게 말 같이 되어야 말이죠. 일벌은 쏘고나면 침과 똥구녁을 내주고 죽습니다. 0607 남양주 월문리에서 ⓒ 김규환
친구도 세 번 째 올라갔다. 내 머리와 얼굴에 있는 침을 빼느라 1분 여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 때였다.
“엄마아~”
갑자기 엄마 하면서 친구가 감나무에서 떨어졌다. 화들짝 놀라 위를 쳐다보니 친구는 감나무 위에 없었다. 거의 바닥 가까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어도 몸은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 덜 다친 것은 감나무 줄기와 가지에 몸이 몇 번이고 부딪히면서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연거푸 엄마를 불러가며 친구는 울기 시작했다. 벌에 쏘인 병아리 마냥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얼른 달려가 몸을 끌어 가 논물 대는 (*)‘깨골창’에 머리를 쳐 박았다. 주위에 있는 작은 냇가에 있는 나뭇가지며 뿌리 채 뽑힌 온갖 풀과 잡것을 친구 머리와 얼굴 목덜미에 대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후려 갈겨대고 물을 퍼부었다.
“푸~푸!” 하는 친구의 지친 소리에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서 “엄마아~” 하는 소리에 놀란 승호 어머니가 모내기 품앗이 갔다가 신발도 신지 않고 논두렁길로 뛰어 오고 있었다.
대롱대롱 여왕벌 근처에 매달려 있던 두 그릇 분량의 벌 덩어리가 한꺼번에 툭 소리도 없이 친구 몸으로 떨어져 옷 속이고 머리통이고 간에 다니면서 쏘아대므로 엄마 소리를 지르고 밑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서 빼 준 벌침만 해도 100개나 되었다. 이렇게 벌에 쏘인 기억은 엄청나다. 그날 우리는 막걸리를 마시지 못했다. 우리가 돌아간 후 승호 아버지께서 오셔서 벌을 쓸어 담아가 친구 집에서 키웠으나 그 지역이 ‘한봉(韓蜂)보호지구’라 2달도 안되어 동네 사람의 손에 무참히 죽었다. 그 호된 경험을 한 우린 둘에게 연말에 꿀 두 되 씩 돌리는 걸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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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이렇게 한봉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양봉업자님들은 아무 데나 마구 이동을 하셔서는 안되니 주의 하십시오. 남양주 월문리는 덕소 근처에 있습니다. 0607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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