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이'에게 플란다스를…

도시의 애완견 문화에 대하여

등록 2003.06.13 18:56수정 2003.06.13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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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으로 주목받은 봉준호 감독의 상업 영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일상의 재치 발랄한 면을 잘 살린 작품이다. 아파트 단지를 무대로 지리멸렬한 일상에 무료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인물들이 개(정확하게 말하면 애완견 내지 애완 강아지)의 실종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펼쳐진다.


a 필자가 한때 키우던 강아지 '뚱이'

필자가 한때 키우던 강아지 '뚱이' ⓒ 김승구

최근들어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부쩍 늘어난 애완견 문화는 시대의 변화를 반증하는 좋은 예이다. 신도시 중산층 주거 지역을 중심으로 애완견 센터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책길이나 가벼운 운동 코스에 애완견을 대동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이처럼 번성하는 애완견 문화 속에서 견식 문화는 동물학대로 취급되는 실정이고, 견식 문화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젊은층에서 확산되는 견식 문화 포기 현상은 기존의 보신탕 업계에는 우려할 만한 현상이지만, 달리보면 이제 개나 강아지는 단순한 장난감이나 음식의 차원을 넘어 우리 일상의 당당한 동반자로서 지위를 획득해 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개를 대하는 시각이나 태도가 계층적 차원보다는 남녀라는 성별적 차원에서 차이가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플란다스의 개>를 분석해 보면 이런 현상을 좀 더 명확히 감지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개와 관련하여 중요성을 띤 인물이 5명 등장한다. 성별로 따지면 여성 4명, 남성 2명이다.


키우던 강아지를 잃어버렸다고 전단지 도장을 받기 위해 아파트 관리 사무실을 찾은 초등학교 1학년 어린 아이, 독거 노인으로 '아가'라 불리는 애완견을 잃어버린 충격에 운명을 달리하는 독거 노인, 그리고 직장 생활 11년 만에 명퇴를 당하여 그 돈의 일부로 '순자'라 불리는 강아지를 산 젊은 여인.

세대를 달리하는 이 여성들에게 있어 강아지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세대의 차이를 막론하고 여성에게 있어 강아지는 삶의 동반자로서 인식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에게는 영혼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강아지이다. 그래서 친구 없는 세상의 학교 다니기는 의미가 없다. 주인공의 아내에게는 강아지는 직장 생활 뒤에 남은 유일한 의미로, 혼자 사는 노인에게는 혈연의 정을 대신하는 대답 없는 손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아파트 관리 사무소 경리 아가씨에게 실종된 강아지는 무료한 일상을 탈출할 수 있는 계기이다. 전단지 도장이나 찍어주고 주판알이나 튀기는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실종된 강아지 찾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남성에게 개는 어떤 의미일까? 교수 임용이 되지 못해 고민하는 인문대 출신의 백수 주인공에게 개는 '먹고살 걱정 없는 유한 계급의 취미 생활'이다. 그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개에게 전이시켜,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사정없이 내팽개친다. 그리고 아내가 사 들고 온 강아지는 100m나 되는 가게를 되돌아가 딸기 우유를 사다 바쳐야 하는 귀찮은 미물일 뿐이다. 주인공은 아내를 경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몰인정한 아내로 몰아붙이기에 이른다.

a 보신탕 집 앞에서 발견한 식견

보신탕 집 앞에서 발견한 식견 ⓒ 김승구

또 경비 아저씨에게 강아지는 식욕의 대상일 뿐이다. 그는 죽은 강아지를 묻어 주는 척 하면서 강아지를 견탕 냄비 속에 집어넣으며 흐뭇해한다.

이 영화는 단일한 공간 내에서 강아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다양한 처지에 있는 인물들을 사건 속으로 엮어 나가면서 재기 발랄한 상상력을 펼친다. 거기에는 일상에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구화되어 가는 인간 군상의 세태를 풍자하는 코믹함과 아울러 진지함이 엿보인다. 여성들의 애완견 문화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남성들의 고립된 관계성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최근들어 급속히 늘어나는 애완견들을 보면 긍정적인 쪽보다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것은 나에게 애완견 체험이 없어서는 아니다.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뚱이'라 이름지어진 놈, 밥 먹이고 똥오줌 치워 주고 목욕까지 시켜 주느라 부산하게 보낸 적도 있다. 그러나 협소하고 번잡한 도시 환경에서의 애완견 문화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찌보면 도시의 애완견 문화는 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강아지를 통해서 감정적 위안을 얻기를 바라는 현대인의 자기애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시골 마을을 활보하는 강아지나 개들을 보면 그 개들이야말로 진정 바람직한 환경에서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도시 강아지들처럼 영영가 듬뿍 담긴 음식을 먹지는 못하겠지만 마음껏 뛰어 놀고 주인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좋으니 그 얼마나 행복할까.

진정한 개의 행복이 아니라 주인의 만족감을 위한 도구로 도시를 채워 가는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인간이란 참으로 교묘하게도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뚱이'를 떠나 보내고 한동안은 수시로 그놈 생각이 나서 후회 막심이었지만, 더 좋은 환경에서 자유롭게 커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그 놈 비슷하게 생긴 예쁜 놈을 한 마리쯤 키워 보고 싶지만 도시에 사는 한은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길 생각이 없다. 어디든지 달려도 차에 치일 걱정 없고, 어디에 똥을 푸짐하게 싸고 사람들의 욕을 먹지 않을 만한 그런 곳에서 내가 먹는 밥과 찬에서 벗어나지 않은 소박한 밥을 줘 가며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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