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으로 변한 바닷물을 어찌 잊을 수 있나"

[현장]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피학살자 유족 증언대회

등록 2003.06.17 19:32수정 2003.06.18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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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는 17일 낮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통합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뜻으로 유족들의 증언을 듣는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는 17일 낮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통합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뜻으로 유족들의 증언을 듣는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다.오마이뉴스 김영균
"그 때 할머니가 얘기했지. '청하야, 니 아부지도 죽고 없는데 너마저 죽으면 안 된다. 총을 쏘면 내가 너를 덮을테니 내 치마 밑에 들어가 있거라'. 그래서 할머니 치마 밑으로 들어갔는데 거기가 뻘밭이었어.

치마 밑에 숨어 있으니까 사이렌이 울리더라고. 할머니는 '저놈들이 이제 총을 쏘려 한다, 꼼짝 말고 있거라'고 했지. 그런데 갑자기 다들 일어서라는 거야. 할머니는 치마 밑에 나를 감추시고는 내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내 등을 발로 꼭 밟고 계셨어." (부청하 제주 북촌리 학살 재경유족회장)


1949년 제주도 북촌리에서 학살을 목격한 6살 소년은 이제 반백의 노인이 됐지만, 당시의 참상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했다. 소년은 그 곳에서 300여명 이상이 살해된 장면을 봤다고 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서 1000여명의 피난민들이 소란스러워졌지. 그 때 미군정찰기가 우리 위로 지나가더니 미군 군함에서 함포가 발사되기 시작했어.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여기저기서 폭발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하는데….

사람 팔, 다리, 머리가 흩어져 있는 참혹한 그 때 장면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파랗게 아름답던 바닷물이 그 때 모두 핏빛으로 변해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안인석 여남송골미함대함포사격 진상규명대책위원회 총무)


1950년 전쟁을 피해 포항 인근 바닷가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당시 5살 소년도 50년 전의 '학살'을 생생히 그려냈다. 소년의 어머니는 젖먹이 동생을 안고 있다 포탄을 맞았다. 피지도 못한 동생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소년의 어머니는 평생 팔을 쓰지 못했다.

언론도 국회도 외면한 "소설을 써도 못 다할 사연들"


일명 '부여 금강문학회 학살사건'을 증언하고 있는 류황렬씨. 류씨의 아버지는 1949년 부여경찰서 형사들에 37살의 젊은 나이에 학살당했다.
일명 '부여 금강문학회 학살사건'을 증언하고 있는 류황렬씨. 류씨의 아버지는 1949년 부여경찰서 형사들에 37살의 젊은 나이에 학살당했다.오마이뉴스 김영균
1950년대 한국전쟁 전후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 사건 피해자들의 한(恨)은 언제쯤 풀릴까.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이하 범국민위원회, 상임공동대표 이해동 목사)는 17일 오전 10시30분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2003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피학살자 유족증언대회>(이하 유족증언대회)를 열었다.


유족증언대회는 범국민위원회 등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관련단체들이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이하 통합특별법) 제정을 위해 지난해부터 마련한 자리. 이미 반세기가 지나 노인이 된 피해자와 유족들이 더 늦기 전에 학살의 진상을 증언으로 남기고 국가가 진실을 밝혀주기를 촉구하는 것이 대회의 목적이다.

제주 북촌리와 포항 여남송골 학살을 목격한 부청하(60)씨와 안인석(59)씨는 이 대회에 증언자로 참석한 유족들. 부씨와 안씨 외에도 군경, 미군에 의한 학살을 증언하기 위해 나선 이날 증언자들은 모두 6명이었다.

부여 출신인 류황렬(69)씨는 이른바 '금강문인회 학살사건'으로 한국전쟁 발발 나흘 만에 부여경찰서 소속 형사들에게 아버지(류인찬, 당시 37세)를 잃은 사연을 소개했다. 해남 출신의 이창준(57)씨는 땅끝마을 해남의 '마산면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이 외에도 거창 보도연맹 학살사건, 청도 곰티재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그 동안 숨겨져 있던 민간인학살의 증언들이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서 속속들이 드러났다.

그러나 한 증언자의 표현대로 "소설을 써도 못다할 사연, 밤을 세워도 못다할" 유족들의 얘기는 정작 법안을 심의해야 할 국회와 언론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국회에서는 김원웅(개혁국민정당) 의원, 이낙연, 배기운(이상 민주당) 의원 등 3명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보름 남은 임시국회, 6월내 통합특별법 통과될까

유족증언대회에서 해원굿을 하는 강혜숙 교수. 50년전 학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이제 전적으로 국회의원들 손에 달렸다.
유족증언대회에서 해원굿을 하는 강혜숙 교수. 50년전 학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이제 전적으로 국회의원들 손에 달렸다.오마이뉴스 김영균
유족증언대회가 열린 17일은 범국민위원회 등 시민단체들이 통합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에서 천막농성에 들어간지 꼭 111일째 된 날이었다.

유족들이 요구하는 통합특별법은 매우 간단하다.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한국군, 미군, 경찰, 우익청년단의 민간인학살 진상을 규명하고 그에 대한 명예회복을 시켜달라는 것.

그러나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나고, 유족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고, 100일이 넘도록 거리의 천막에서 농성을 벌이기까지 법안은 국회 상임위마저 통과 되지 못하고 있다.

이날 유족증언대회에 참석한 개혁당 김원웅 의원은 격려사 도중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 문제를 반대하고 또 극우단체라는 세력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며 "통합특별법 문제를 언론이 너무 앞서서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남겼다.

언론이 너무 앞서 가면 극우단체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고, 자칫하면 통합특별법 제정을 위해 지금까지 이뤄놓은 일들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김원웅 의원의 격려사는, 전쟁이 끝난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민간인학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증언대회에 참석한 유족들의 소원은 현재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인 통합특별법이 6월 현재 열리고 있는 임시국회 회기 내에 통과되는 것이다. 범국민위는 올해 6월이 통합특별법 제정의 적기라고 판단, 이번 국회에서 특별법 제정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낙선운동에 들어갈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언제쯤 해당 소위원회를 거쳐 상임위, 법사위, 본회의까지 상정될 지는 불명확하다. 범국민위원회 이창수 정책실장도 이날 투쟁경과 보고에서 "이번 회기내에 특별법이 통과될 가능성이 100%일 수도 있지만, 아예 안 될 가능성도 100%"라고 밝혔다.

현재 개회 중인 제240회 임시국회는 7월 1일 본회의를 마지막으로 끝나게 된다. 남은 보름의 기간 동안 통합특별법은 소위원회부터 본회의까지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

50년 유족들의 억울함이 풀리고 안 풀리고는 이제 전적으로 국회의원들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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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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