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업고-안고 수업하는 선생님과 학생

[까탈이의 세계여행] 라오스 여행기 2

등록 2003.07.10 08:11수정 2003.07.1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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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살리로 가는 중간에 점심을 먹는 라오스 사람들. 찰밥과 생선과 죽순이 주메뉴로 수저없이 손가락으로 찰밥을 꼭꼭 눌러 가며 먹는다.
퐁살리로 가는 중간에 점심을 먹는 라오스 사람들. 찰밥과 생선과 죽순이 주메뉴로 수저없이 손가락으로 찰밥을 꼭꼭 눌러 가며 먹는다.김남희
"잔머리로 흥한 자 잔머리로 망하리라."

오늘 몸으로 배운 교훈이다. 동행하는 친구를 배신하고 혼자 편하게 가보겠다고 머리 쓰다가 된통 당한 하루였다. 우리가 타고 갈 버스가 최고급 고속버스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미니밴은 되겠거니 했던 소박한 기대가 무참히 깨진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됐다.


루앙남타에서 아홉 시간이 걸리는 퐁살리까지 가는 버스는 '버스'가 아니었다. 트럭을 개조해 뒷자리에 두 줄로 판자를 대놓은 "쏭태우"가 라오스의 가장 보편적인 이동수단이란다. 이 차를 타고 9시간을 가야 한다니.

게다가 트럭 안은 이사라도 가는 것처럼 엄청난 짐들로 가득 들어차고, 한 줄에 6~7명이 앉으면 충분할 자리에는 열두 명씩 비집고 들어앉아 몸을 돌릴 수조차 없다. 어떻게든 편하게 가보겠다고 운전사 아저씨를 꼬셔서 트럭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싶었더니, 그 자리는 운전사의 가족들이 앉는 자리고, 나는 그 뒤 창도 없이 앞뒤가 다 막힌 짐칸에 세 명이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가야 하는 거였다.

어느 집 마당에 만들어진 나팔꽃 바침대. 참 가지런하고 예쁘게도 만들어 놓았다.
어느 집 마당에 만들어진 나팔꽃 바침대. 참 가지런하고 예쁘게도 만들어 놓았다.김남희
그 좁은 자리에 끼어들자마자 숨이 막혀오고, 구겨 놓은 무릎은 벌써부터 쑤셔온다. 결국 다시 뒷자리로 도망치듯 돌아오니 당연히 자리는 없다. 아침 7시부터 나와 맡았던 자리는 앞으로 옮기면서 꼬마들에게 "여기 앉아!" 호기롭게 양보하고 떠났기에.

그 자리를 다시 달라고 할 수도 없어서 결국 트럭 발판에 매달려서 가게 생겼다. 퐁살리를 함께 여행하기로 한 폴란드 청년 토마스와 한 라오 청년이 자리를 바꿔주겠다고 하지만, '내가 저지른 일 내가 수습해야지' 싶어 씩씩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시작되는 후회.


'앉으라고 할 때 앉을 걸.'
'아니, 적어도 세 번은 권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한 번 권하고 말다니 기사도도 없네.'

아, 이럴 때 나는 왜 내가 여자임을 내세워 특별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걸까. 정말이지 그런 내가 싫다.


30분쯤 그렇게 매달려서 가고 있으려니 토마스가 신선한 공기가 쐬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바꿔준다. 못 이기는 척 승낙하고 비좁은 틈으로 들어가 엉덩이를 반쯤 걸치니 그래도 살 것 같다.

어린 아이를 안고 수업 중인 선생님.
어린 아이를 안고 수업 중인 선생님.김남희

이 아이들이 메고 있는 가방은 물레를 돌려 직접 짠 라오스 전통 가방이다.(왼쪽) / 어린 동생을 업고 학교에 온 어린이
이 아이들이 메고 있는 가방은 물레를 돌려 직접 짠 라오스 전통 가방이다.(왼쪽) / 어린 동생을 업고 학교에 온 어린이김남희

그 다음부터는 계속 30분씩 자리를 교대하며 온다. 문제는 트럭 발판에 나가서면 비포장 도로의 온갖 먼지를 다 마시면서 와야 하기 때문에, 금세 머리부터 신발까지 온 몸이 황토색 흙투성이로 변한다는 거다.

좁은 트럭에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고, 심지어 지붕에까지 서너 명이 올라탔는데 라오 사람들은 불평 한 마디 없다. 우리나라 같으면 다들 불평을 토로하고 한마디씩 하느라 한동안 난리가 났을 텐데.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면 금세 서고, 누가 내린다고 하면 또 서고, 탈 사람이 있으면 또 서고, 사람 없이 짐만도 내리고 싣는다. 정해진 정거장도 없고, 규칙도 없이 트럭은 달린다. 그러더니 점심을 먹으라고 차를 세운다.

중국에서처럼 식당이라고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하나밖에 없는 마을에 세워준 후 비싸고 맛없는 밥을 먹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는 한갓진 마을에 서더니 알아서 먹으라는 분위기다.

담벼락을 따라 심어진 꽃들.
담벼락을 따라 심어진 꽃들.김남희
이럴 줄 모르고 아침에 산 바게트는 그 자리에서 다 먹었으니 꼼짝없이 굶게 생겼다. 그 사이 사람들은 비닐 봉지를 하나씩 주섬주섬 푸르더니 한 곳에 모여 상을 차리고,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토마스와 나를 부른다.

후다닥 달려가니 먹을 거라곤 찰밥 덩어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생선구이, 그리고 소금과 고춧가루를 섞은 매운 양념에 뿌려 먹는 죽순이 전부다. 젓가락도 없고, 수저도 없다. 손으로 밥을 한 덩어리 뜯어서 입에 넣고, 다시 또 손으로 생선을 움켜쥐고 먹는다.

그래도 덜컹거리는 도로를 흔들리며 와서인지 배가 고파 잘도 넘어간다. 권하는 대로, 손에 쥐어주는 대로 덥석덥석 잘도 받아 먹는 나. 염치도 없이 내 밥처럼 배부르게 먹고 나니 트럭은 다시 달린다.

그 사이 거센 소낙비가 쏟아져 트럭 옆의 가리개천을 내리고, 지붕 위에 탔던 사람들이 트럭 안으로 피신을 오는 등 한바탕 난리를 치른다. 마침내 5시가 넘어 버스는 우리를 퐁살리에 내려놓는다.

퐁살리는 라오스 북쪽 산간지역의 작은 도시이다. 고도가 높은 산각지역이라 저녁이면 긴 팔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기온이 내려간다. 그렇기에 더운 물 샤워가 되는 숙소를 찾아 온 마을을 헤매고 다닌다. 마침내 더운 물 샤워가 가능한 숙소를 찾아내 40000킵(우리 돈 4000원)에 방을 얻는다.

이렇게 최소한의 짐만으로 여행을 다닌다는 건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텐데, 나는 어쩌면 이렇게 그 배움의 길에서 늦된 아이일까? 주어진 여건에서는 늘 좀더 나은 것을 얻으려 하고, 방을 구하는데도 겉꾸밈에 혹해 버리곤 하니.

그러고선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하루 이틀 다닐 것도 아닌데 이왕이면 싼값에 깨끗한 곳에서 자야지'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그런 내가 때로는 진저리나게 싫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조차 내가 보듬어 끌어안고 가야하는 나임을 알기에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저녁을 먹고 들어와 샤워하고 빨래를 한다. 아무리 헹구어도 옷에서는 붉은 흙탕물이 계속 우러난다. 빨래하느라 남은 힘을 모두 소진하고 잠자리에 든다. 길고도 힘들었던 하루.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들을 구경하는 어린이들.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들을 구경하는 어린이들.김남희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들을 구경하는 어린이들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들을 구경하는 어린이들김남희

온 동네를 깨우는 마이크 소리에 잠이 깨니 6시가 채 안 된 시간이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남자가 쉬지도 않고 뭔가를 말하고 있다.

"새벽부터 이거 도대체 무슨 방송이야?"
"뭐, 들으나마나 선전방송 아니겠어?"

공산주의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토마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아니, 선전을 이렇게 새벽부터 해야만 하는 거야?"

투덜거리며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한다.

근처 식당에서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고 트레킹을 시작한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온다. 살짝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운동장이랄 것도 없는 작은 공간을 나눠 쓰며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나란히 서 있다.

창가를 기웃거리며 공부하는 아이들 구경을 하는데, 사실은 아이들이 우리를 구경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다들 교실에서 뛰어나와 "파랑! 파랑! (외국인이다! 외국인이야!)"을 외치며 주변에 늘어서 신기한 듯 우리를 바라본다.

이곳 학교의 놀라운 점은 젊은 여선생님들이 전부 아이를 학교에 데리고 와서 업거나 교탁 위에 눕혀놓고 수업을 한다는 거다!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가 보니 듬성듬성한 나무 벽으로 사방을 두르고 교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작은 칠판과 나무 책상과 걸상이 전부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이 교실 저 교실을 들락거리며 놀다가 나온다. 선생님들은 그런 우리를 말리기는커녕 함께 따라 다니거나 웃으며 바라볼 뿐이다. 더 있다가는 하루 종일 아이들 수업을 땡땡이치게 할 것 같아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숲길로 들어선다.

크기가 제멋대로인 나무의자와 책상.
크기가 제멋대로인 나무의자와 책상.김남희

작은 칠판뿐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눈망울은 초롱초롱 맑기만 하다.
작은 칠판뿐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눈망울은 초롱초롱 맑기만 하다.김남희
오토바이나 다닐 수 있는 좁은 흙길은 풀을 먹이려고 소나 염소를 끌고 나온 농부들을 빼고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다. 세 시간 남짓 흙길을 따라 걷는다. 한쪽으로는 퐁살리 마을이 점점 멀어져가고 다른 쪽은 다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근처 마을에 들어가 물을 한 병 얻어먹고, 길을 물으니 퐁살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온 길을 그대로 돌아나가야 한단다. 같은 길을 또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는 토마스 때문에 마을 어른들 말을 무시하고 숲으로 들어갔다가 정글 탐험을 모질게 했다.

"분명히 길이 있을 거야. 저기 보이는 저 큰 길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거야."

젊어서 무모한 토마스를 따라 다니려니 매 순간이 모험의 연속이다. 뜨거운 아열대의 태양에 온 몸을 데운 채 길도 없는 곳을 헤매다가 결국에는 냇물을 첨벙거리며 건너고, 남의 밭 울타리를 뛰어 넘고 나서야 간신히 마을로 복귀한다.

한낮의 태양 아래 헉헉대다 식당에서 어렵게 구한 차가운 물 - 이렇게 더운 지역에서 냉장고에 물을 넣어두고 파는 가게가 없다니! - 은 그야말로 생명수 같이 달콤하다.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이고, 이 마을에 하나뿐인 빵집으로 간다. 이 빵집의 메뉴는 딱 두 개. 식빵과 바게트.

갓 구운 바게트 빵을 가득 팔에 안고 돌아오는 길,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가 인사를 건넨다. 오늘 하루도 즐거웠느냐고.

트레킹 구간 중의 풍경들.
트레킹 구간 중의 풍경들.김남희

트레킹 구간 중의 풍경들.
트레킹 구간 중의 풍경들.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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