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에 쌓인 바칼로레아

최병권·이정옥 엮은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등록 2003.07.14 11:36수정 2003.07.1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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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하출판사에서 나온 인간과 철학 시리즈를 통해 처음으로 '바칼로레아'라는 시험을 접했다. 그 시리즈는 짧은 책이었지만 인간과 노동, 인간과 자유, 인간과 문화, 인간과 권력 같은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런 책을 대학입학자격시험용으로 읽는다는 게 나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이런 공부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나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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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휴머니스트

최병권과 이정옥이 엮은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예리한 질문과 놀라운 답변들>(휴머니스트, 2003)은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모범답안을 소개하고 있다.


그 답안 하나하나가 놀라운 수준을 보여준다. 과거와 기억을 설명하기 위해 니체와 프로이드가 인용되고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데카르트와 헤겔, 맑스, 바슐라르가 등장한다. 고등학생들이 그런 사람들의 이름과 이론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그것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낼 수 있다니 더 놀라울 따름이다.

엮은이 소개

최병권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독일 쾰른대학에서 공부했다.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 문화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후 지금은 Weekly SOL 발행인을 맡고 있다. 저서로 <세계시민입문> 등이 있다.

이정옥은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 교환교수를 지낸 후 지금은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Weekly SOL 편집위원장. 저서로 <한국 성사회학의 방법론적 모색> 등이 있다.
엮은이들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타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가다듬자." 수학과 철학의 나라, 논리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프랑스라는 나라를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가다듬자는 것이다.

좋은 취지다. 그런데 이런 좋은 취지는 몇 가지 함정들을 가지는 것 같다.

엮은이들의 얘기는 밖을 보며 나를 가다듬자고 주장했던 개화기 한국 지식인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 역사적 경험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밖만 바라보는 시선의 위험성이다.

우리 것을 무조건 고집하는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서구의 것을 무조건 따라가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도 대안은 아니다. 사실 문제의 수준만을 따진다면 한국의 논술고사도 이젠 바칼로레아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모범답안이 아니라 프랑스식 교육체계가 가진 장점일지 모른다. 바칼로레아라는 시험으로만 집중된 관심은 한국의 잘못된 교육체계를 바로잡는데 그리 큰 쓸모가 없다.

사실 바칼로레아에 대한 관심의 열풍은 논술시험에 대한 관심에서 자유로울까? 바칼로레아 자체는 좋다 할지라도 그것이 한국에 도입되는 맥락은 한국의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런 맥락을 캐는 것도 철학과 사회학의 역할이다. 최병권, 이정옥씨는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 책에서 제시된 모범답안들은 '모범'이라 그런지 각기 다른 문제에 답하고 있지만 일종의 정형화된 패턴을 따르고 있다.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논리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사상가들을 적절히 배치한다. 하지만 탄탄한 논리구조에 비해 결론은 그리 '쌈빡'하지 않다.

왜 그럴까? 서론, 본론은 배우고 읽은 것을 적절히 섞으며 만들 수 있지만 결론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결론이 약하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목소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철학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해 말을 하도록 목구멍을 틔워주는 일이다. 그런데 훌륭하다는 바칼로레아 모범답안 역시 현실의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학자들의 이름만 나열될 뿐, 프랑스의 현실을 정교하게 분석하고 비판한 답안은 없다.

헨리 지루(Henry A. Giroux)는 <교사는 지성인이다>(아침이슬, 2002)라는 책에서 글쓰기 교육에 대한 발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루는 규칙을 엄격히 강조하는 기술중시 학파와 훌륭한 저자를 따라하게 하는 모방중시 학파, 내면과 즐거움을 강조하는 낭만중시 학파가 현재 글쓰기 교육을 망가뜨린다고 본다. 세 학파 모두 '글을 쓸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지루가 강조하는 변증법적 글쓰기는 "글쓰기 과정을 작가와 주제의 관계이자 작가와 독자의 관계, 교재와 독자의 관계"로 보고 "어떤 역사가, 왜 사태가 그러한지, ­무엇이 왜 일어났는지 그 의미를 설명하려는 저자의 시도­를 판단하는 것을 학생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지루는 "학생들이 알아야 하거나 친숙해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정전을 새로 짜는 것 역시 아무리 새롭고 기존 가치를 뒤엎는 것이라 해도 사실은 문화의 전통적인 위계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문제는 문화학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문화적 가치에 군말없이 학생들이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존재조건을 잘 분석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바칼로레아는 훌륭한 시험이다. 우리도 그 시험의 장점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교육체계와 분리되어 달랑 논술에 관련된 것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게다가 엮은이들이 밝히는 도입목적이 "창조성이 모방성보다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냄"이고 "창조성을 기르지 못한 인간은 결코 높은 생산성과 경쟁력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논술양식의 도입이 아니라 인간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기르는 '새로운 교육체계'이다.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1 - 개정판, 종합편,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예리한 질문과 놀라운 답변들

최병권.이정옥 엮음,
휴머니스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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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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