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공간에 스며있는 숨겨진 감각

에드워드 홀의 <숨겨진 차원>

등록 2003.08.15 07:30수정 2003.08.1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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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기본적으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각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시간과는 구별된다. 그래서 공간은 감각기관과 밀접히 연루되며 복잡한 사고 체계를 거쳐 형성된 시간과는 달리 보다 깊고 넓은 생물학적 기반에 근거한다.

그러나 똑같은 감각기관과 공통의 생물학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나라마다 사람들마다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예컨대, 실내 공간의 사용에 있어 일본인들은 방 가장자리를 비워두는 반면 서구인들은 벽 가까이나 벽면에 가구를 비치하여 가장자리를 채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에드워드 홀의 <숨겨진 차원>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명쾌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답변을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감각은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패턴화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감각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러한 상이한 감각세계가 공간을 구조화하고 사용하는 방식―에드워드 홀은 이를 프록세믹스(proxemics)라는 용어로 부르고 있다―에 있어서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이다.

일본인과 서구인이 실내 공간의 사용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는 것도 벽과 가구 그리고 실내 공간을 일본인들은 반고정 형태의 공간으로 간주하여 방의 중심부를 채우는 반면 서구인들은 고정 형태의 공간으로 간주하여 방의 가장자리를 채우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미국의 방을 보고는 황량해 보인다(중심부가 비었기 때문에)고 평하는 것은 이처럼 다른 문화에서 형성된 다른 감각세계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드워드 홀이 <숨겨진 차원>에서 드러내보이고자 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숨겨진 공간은 결국 프록세믹스의 깊은 저변을 이루는 '문화'라는 숨겨진 감각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 홀은 프록세믹스를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는데, 각각의 논의들이 근거하고 있는 풍부한 지식과 다양한 사례는 '문화학'이 얼마나 풍부한 스펙트럼을 지닌 학문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인간의 생물학적 과거에 뿌리를 둔 기층문화적(infracultural) 차원에서의 프록세믹스를 분석하면서 그는 인간 감각의 진화와 관련된 중요한 통찰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과밀'은 종내 경쟁을 격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조상들은 수상(樹上) 생활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간은 후각 대신에 시각을 발달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간의 생리학적 구조에 기초한 전문화적(precultural) 차원에서는 그러한 진화의 결과로써 현재 인간이 지니게 된 감각 체계의 구조와 기능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특히 공간을 재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시각이 미술에서 어떤 식으로 사용되고 발달해 왔는가를 분석한 제7장 '지각의 단서로서의 예술'은 미술전문가 못지 않은 예리하면서도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람들 간에 그리고 나라들 간에 발견되는 문화적 차이에 주목하면서 미시문화적(microcultural) 차원에서의 프록세믹스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및 아랍 세계의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프록세믹스 패턴들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은 그 민족의 지각세계의 구조를 결정하는 숨겨진 문화적 틀에 근거함을 보여주는 다양하고 설득력 있는 사례들은 숨겨진 감각으로서의 문화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다양한 나라와 문화권에서 온 다양한 인종들의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 오늘날의 대도시들이 보여주고 있는 공간의 구조와 형식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을 다 함께 품어주기에는 역부족이고 이에 따라 이문화간 갈등이 더욱 깊어지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도시는 인류가 뱉어낸 가래침이다'라는 장 자크 루소의 말처럼, 현대의 거대도시는 인간의 연장물이 제공하는 모든 편리와 불편을 동시에 지니면서 환경문제, 인구문제, 인종문제 등 인류의 온갖 골칫거리를 제조하고 있는 거대한 공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도시의 문제를 인류의 미래와 직결된 것으로 보고 있는 에드워드 홀은 숨겨진 감각으로서의 문화, 즉 프록세믹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적용이 이러한 거대도시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도시 계획에 기존의 전문가들 이외에 심리학자, 인류학자 등의 새로운 전문가들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 홀의 <숨겨진 차원>은 이처럼 인간에게 편안하고 유용한 공간설계를 위해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여러 문화적 요인들을 인간의 생물학적 과거와 생리학적 구조 그리고 나라마다 다른 문화적 차이에 입각해서 다양하고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이 건축학도들에게 필독서로 손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2 : 숨겨진 차원 - 공간의 인류학

에드워드 홀 지음, 최효선 옮김,
한길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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