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비오는 날, 우산 속에서의 특강

등록 2003.08.25 06:40수정 2003.09.0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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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느껴졌습니다. 전화를 받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반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언젠가는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 대뜸 하는 말이, 나중에 졸업하면 찾아오지도 않을 아이들에게 뭐 하러 잘해주고 그러냐고 저를 사뭇 다그치던 아이.

"선생님, 저 은혜예요. 지금 도서관이세요?"
"응. 왜?"
"저, 지금 거기 갈 건데요. 누구랑 같이 가도 되죠?"
"그럼 더 좋지."
"그게 아니고요. 알았어요. 지금 갈게요."

잠시 후 도서관에 나타난 은혜의 품에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한 마리씩 안겨 있었습니다. 은혜는 유난히도 동물을 좋아해서 집에서 개와 고양이를 다섯 마리나 키우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예쁜 녀석 두 마리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저는 보던 책을 놓고 개와 고양이를 차례로 안아 보았습니다. 아직은 살뜰한 정이 가지 않는 동물이지만 하얀 색깔의 보드라운 털에서 포근함이 느껴졌습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한참을 책 속에 흠뻑 빠져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은혜도 도서관 소파에 앉아 열심히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개와 고양이는 얌전하게 주인 곁에 앉아 있었지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밖이 갑자기 소란해지더니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도서관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고 세차게 쏟아졌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집에서 우산을 챙겨 가지고 나왔지만 은혜에게는 우산이 없었습니다. 교무실에도 여분의 우산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두 마리의 동물을 가슴에 앉고 거센 빗발을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우산을 내밀었습니다.

"가자. 집까지 바래다줄게."
"선생님, 먼저 가세요."
"먼저 가면 넌 어쩌려고. 애들도 비 맞으면 안 되잖아."
"선생님이 귀찮잖아요."
"귀찮다니? 어서 들어와."

은혜는 마지못해 우산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과 두 마리의 동물이 한 우산 속에 있으니 비좁기는 했지만 어딘지 단란한 분위기가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 교정을 벗어날 때였습니다. 은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지금 저희들이 귀찮으시죠?"
"귀찮다니? 이것도 좋은 추억이 되겠는데."
"솔직히 귀찮잖아요. 저 같으면 집에 안 바래다주고 그냥 갔을 거예요."
"지금 조금도 귀찮지 않아. 그리고 좀 귀찮으면 어때서."
"저 졸업해도 나중에 선생님 찾아 뵙지도 않을 건데요?"


그 말을 듣자 저는 은혜에게 무슨 말인가 해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지만,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는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도 말해주거나 가르친 적이 없어서 잘 모를 수밖에 없는 것도 말입니다. 특히 대학입시나 성적을 올리는 일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인간관계의 비밀이나 사랑의 원리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지요. 저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두 가지 동기로 행동을 하게 되지. 나를 위해서 행동을 하거나, 남을 위해서 행동을 하거나. 지금은 널 위해서 바래다주는 거야. 넌 지금 우산이 없으니까. 집이 먼 것도 아니고, 더욱이 내가 평소에도 널 많이 아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그런데 만약 내가 어떤 보답을 바라고 널 바래다준다면 그건 널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은 나를 위한 거지."


그런 얘기 끝에 자연스레 이런 말도 나왔습니다.

"어쩌면 내가 너희들을 가르치는 것은 나를 위한 행동이기도 해. 월급을 받기 위한. 월급을 받아야 가정생활도 하고 책도 사보고 그럴 테니까. 하지만 국가로부터 정당한 보수를 받았으니까 너희들에게는 주기만 해야지. 무엇을 바라고 행동해서는 안되지. 졸업 후에 선생님을 찾아 주길 바라고 사랑을 주는 것은 잘못이란 말이지."

그날 우연히 시작된 우산 속에서의 특강은 이렇게 갈무리가 되었습니다.

"네 말대로 만약 네가 귀찮지만 어떤 도덕적 의무감에서 너를 바래다주고 있다면 난 지금 행복하지 않겠지. 알고 보면 가장 고차원적이면서도 사실은 가장 쉬운 것이 사랑으로 하는 행동이야. 만약 네 남자 친구가 널 집까지 바래다준다면 귀찮기는커녕 행복감을 느낄 거야. 내가 우리 반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도 그래. 사실은 내 사랑이 부족해서 문제지, 정말 아이들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건 누구보다도 내 자신에게 좋은 거지."

조금은 엉뚱한 구석도 있고, 삶의 어느 과정에서 뒤틀렸는지 냉소적인 면도 없지 않은 그 아이는 그날 저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절을 꾸벅하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이틀이 지났습니다. 은혜에게 메일이 왔는데 편지 중에 이런 글귀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날 비오는 날 저랑 짐승들이랑 집까지 바래다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선생님이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따뜻한 온정, 오래 잊지 않겠어요."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나, 저녁 산책을 하고 있다가 은혜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저에게 초콜릿을 좋아하냐고 물었습니다. 연인이나 친구끼리 초콜릿을 주고받는 발렌타인데이는 얼토당토않게 멀어서 무슨 일일까 했지요. 그런 궁금증이 풀린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a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 안준철

아침 8시 반. 도서관을 찾아온 은혜의 손에는 빨간 초콜릿 상자가 들려 있었습니다. 저를 보자 처음에는 쑥스러운 듯 몸을 꼬아 상자를 감추더니 이내 초콜릿 상자를 저에게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맛이 없어도 맛있게 드셔야 해요. 솜씨는 없지만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럼 이 상자도 네가 만들었니?"
"예."
"이 구슬 같이 생긴 것들은 어떻게?"
"집에 있는 것들을 모아다가 본드로 붙였어요."

저는 할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초콜릿 제조법을 모르는 저로서는 공을 얼마나 들여야 그런 작품이 나올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잘 익은 붉은 포도주 빛이 나는 상자에 크고 작은 구슬들을 어디선가 떼어 본드로 정성스럽게 붙이고 있었을 아이의 모습이 영상처럼 떠오르면서 그만 코끝이 찡해지고 만 것입니다.

저는 그날 교사로서, 혹은 한 사람의 이웃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이지만, 저에게 돌아온 것은 크고 아름다운 마음의 선물이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과분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저는 차츰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은혜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주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날 밤, 저를 위해서 정성스레 초콜릿을 만들고 상자에 예쁜 구슬을 붙이고 하면서 '나'를 위한 행동보다는 '남'을 위한 행동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사랑하는 제자의 인생 여정에 그 이상의 선물이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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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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