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정태세문단세..., 요령껏 암기의 계보

<암기의 추억 2> 이 얼마나 위대한 '요령'의 산물인가?

등록 2003.08.26 23:10수정 2003.08.2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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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세상이 빨리 변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수험생들의 암기법이다. 학생 신분으로 느끼는 거지만 왜 그렇게 항상 '달달' 외워야 하는 것들이 많은지 말이다.

무턱대고 외우는 것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또 금방 잊어먹기 때문에 비효율적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비해 공부할 양이 너무도 많다. 게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어찌나 많은지….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로부터 여러 가지 암기 비법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으니, 그것이 이름하야 '요령껏 암기의 계보'이다.

지난 겨울, 유난히도 약한 과목인 수학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되자, 나는 누나가 다니는 대학교의 어떤 형으로부터 (나는 그 형을 '현문이형'이라고 불렀다) 수학 과외를 받게 되었다.

명제를 배우던 중, 현문이 형은 p가 q로 가는 수식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쉽게 가르치기 위해선지 이렇게 설명했다.

"p가 q한테 화살을 쏜 거지. q는 맞고 나서 '윽'하고 피를 흘린 거야. 그래서 q는 p이기 위한 '피'요조건이야."
"엑, 엉터리."
"나도 내 선생님한테 그렇게 배웠다니까."

별로 납득(?)이 가지는 않는 상황이었지만 현문이 형의 가르침을 받들어 지금도 이 개념은 잊지 않고 있다.


이와 비슷한 예는 많았다. 고1 수학시간, 내가 가장 싫어하고 어려워했던 삼각함수를 배우던 중, 선생님께서 좌표에 따른 삼각함수의 부호를 가르치시며 이렇게 외우라고 지시하셨다.

"얼-싸-안-고!"


서강훈
설명을 하자면, 좌표의 1사분면상에서는 삼각함수의 부호가 모두 양수이므로 all, 2사분면에서는 싸인의 부호만 양수니까 , 이런 식으로 해서 엄연히 말해 얼싸탄코인데 그냥 쉽게 외우라고 얼싸안고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내용은 고등학생들이 푸는 수학 문제지 중 하나인 '定石'(정석)책 478쪽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밖에도 과학영역에서는 표준광물의 굳기를 쉽게 외우기 위해 학생들 사이에 통용되는 방법이 있다.

원래는 '석-고-해석…'인데, "활석방의 형이 인정이 없어서 동생을 석황에 강금했다"로 기억하고 외우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예가 일종의 '시나리오법'에 해당된다면 첫 글자와 특유의 리듬을 이용한 암기법도 있다.

서강훈
그것은 조선의 왕들의 이름 중 앞 글자만을 따서 외우는 것으로 흔히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등으로 쓰이는 방식이다.

이렇듯 그 수나 종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암기법들은 일단 익히기만 한다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학력고사'를 거쳐 '수능'으로 넘어오는 세대들에게서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요령'의 산물인가?

그것은 또한 우리 후배들에게도 값진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이 '요령껏 암기법'들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수험생들에 의해서 수없이 창작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능에 관련된 여러 과목을 공부하면서, 많은 종류의 '요령껏 암기법'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 발상의 '뜬금없음'과 일련의 '유치함'이 매우 재치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디서 끌어왔는지도 모를 '시나리오'와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리듬', 그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온전히 전수되고 있다.

그렇지만 배운 내용을 배우고 또 배우고 여러 번 복습을 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요령껏 암기의 계보'가 한편으로 슬픈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선배들이 공부할 때)에도 얼마나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으면 이런 식으로라도 암기하려는 생각을 했을까하는 연민이 드는 것이다. 그 계보를 받들어 우리도 여전히 그 방식을 사용하고 또 계승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 슬퍼진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당차고 밝은 모습을 지닌 10대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아무리 긴 터널도 언젠가는 그 끝이 나타나듯이 하루하루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도 그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받을 날을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고 있는 이 생활에 마냥 짜증만 내고 있기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기 위해 이처럼 재미있고 유쾌한 '요령껏 암기법'을 충실히 전수하는 동시에 또 새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 집안의 족보는 못 외울지언정 별 거리낌 없이 외울 수 있는 '요령껏 암기법', 그 속에는 벌써 고3 수험생활의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우리들의 애환이 진하게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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