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20

빙화 구연혜 (3)

등록 2003.09.03 13:41수정 2003.09.0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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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형당 당주가 되고 싶다고 하였을 때 철룡화존은 두툼한 서책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읽어봐라. 네 나이 이제 열아홉이다. 혼기가 꽉 찬 나이지."


"그래서요? 시집이라도 가란 말씀이신가요?"
"그렇다. 너도 이제 마음에 드는 배필을 만날 나이가 되었다."

"싫어요. 전 아직은 누군가에게 예속되고 싶지 않아요."
"싫든 좋든 일단 그 안에 기록된 자들을 살펴봐라."

말을 마친 철룡화존은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였기에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자식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치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빙화가 서책을 받아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무림천자성은 물론 당금 천하는 철룡화존 구부시의 말이 그대로 법(法)인 세상이다. 빙화는 부친의 일방적인 결정이 싫었지만 말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기에 나온 것이다.

그 날 이후 빙화는 서책을 읽어보았다. 보라고 했는데 보지 않으면 무슨 꾸중이 내려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청년 백 명의 인적사항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무림천자성 사람이며 용모파기와 함께 직위, 무공 및 학문의 정도, 배경, 성품 등등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잠을 잘 때 코를 고는지 여부와 이빨을 가는지도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 빙화는 기록된 모든 사람들을 일일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눈에 차지 않았다.

학문이나 무공, 혹은 용모 등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들 대부분은 출세욕에 눈먼 자들이었다.

이런 사내들은 여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원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출세하는 것에만 관심이 쏠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에 찰리가 없었던 것이다.

모두를 살펴본 뒤 빙화는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구체적이면서도 상세하게 기록한 문건을 들고 철룡화존을 찾았다.

이것을 받아 본 구부시는 할 말이 없었다. 기록된 대로라면 여식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혼사는 뒤로 미뤄졌고, 대신 형당 당주가 된 것이었다.

"많이 다친 것 같던데…, 괜찮은가 하나 한번 볼까?"

머리를 매만지던 빙화는 침의를 벗고 백의 경장을 걸쳤다. 잠시 후 그녀는 규환동 입구에 나타났다.

"홍춘이 엉덩이는 펑퍼짐하고, 옥화의 젖탱이는 축 늘어졌다네… 헉! 당주께서 이 시간에 여길…? 그, 근무 중 이상 무!"

건들거리는 몸짓으로 건들거리면서 저속한 노래를 부르던 옥졸은 빙화가 나타나자 혼비백산하며 자세를 바로 하였다.

"흥! 근무수칙에 번을 서면서 노래를 부르도록 되어 있나?"

싸늘한 빙화의 시선과 어투에 옥졸은 즉각 무릎을 꿇었다.

"헉! 아, 아닙니다. 소, 속하가 잘못했습니다."
"좋아, 순순히 죄를 인정하니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하지. 대신 지금부터 반 시진 동안 쪼그려 뛰기를 실시한다. 알겠나?"
"조, 존명!"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옥졸은 죽어라고 쪼그려 뛰기 시작하였다. 차갑기로 이름난 빙화에게 잘못 보이면 그 순간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에 조금의 요령도 피우지 않았다.

이날 이후 옥졸은 무려 열흘이나 걷지를 못했다고 한다. 이것을 본 다른 사람들 모두 빙화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별것도 아닌 이 일은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빙화가 형당 당주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잡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이회옥이 있는 뇌옥에 가까워졌을 무렵 빙화는 이상한 냄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껏 맡아온 냄새는 퀘퀘한 곰팡이 냄새와 오물 냄새, 그리고 살이 썩는 냄새와 비릿한 혈향 뿐이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냄새가 났기에 이상하다 생각한 것이다.

"흐음! 이 냄새는 뭐지? 이건 마늘 냄새 같은데? 흠! 이 냄새가 왜 여기서 나는 거지? 부당주!"
"속하 여기에 있습니다!"

기별을 받자마자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온 부당주는 빙화가 자신을 부르자 즉각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이 냄새가 어디에서 나는지 확인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지상최고의 명령이라도 떨어졌다는 듯 킁킁거리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부당주는 마치 사냥에 따라나선 개 같았다.

매부리코에 가늘게 찢어진 눈, 치켜 올라간 눈 꼬리와 얇디얇은 입술을 한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몸짓이었다.

"여, 여깁니다. 마늘 냄새인 것 같습니다. 아씨!"
"아씨…? 부당주는 본 당주가 당주로 안 보이나 보죠?"
"헉! 아, 아닙니다. 당주님!"

부당주는 빙화의 심기를 건드렸나 싶어 안색이 창백해졌다.

방금 전 규환동에 들어섰을 때 본 옥졸은 죽기 살기로 쪼그려 뛰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당주의 명이라 하였다. 이 소리에 부당주는 내심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아무도 없는데 요령 피울 생각조차 못하고 죽어라고 뛰는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자신을 노려보자 전신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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