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한글 이름패, 의원 각자가 선택하게

[주장] 한글 이름패 거부하는 국회를 보고

등록 2003.10.10 13:16수정 2003.10.1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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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한글날 통합신당 국회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 놓인 의원들의 한자 이름패(명패)를 한글 이름패로 바꾸어 줄 것을 요구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당 소속 의원들의 한글 이름패를 들고 본회의장으로 들어가려다 국회 사무처 직원들에게 제지당해 이름패를 한글로 바꾸려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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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권위와 허위 의식에 찌든 국회에 신선한 상식(한국 사람이 한글로 이름 쓰는 게 상식이다)의 바람을 불어넣어 모처럼 한글날을 한글날답게 만들어 준 의원들을 보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 나라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분들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회를 또 보게 되어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습니다.


이런 시도는 1992년에도 있었습니다. '한글문화단체 모두모임'이 당시 국회의원 모두의 이름패를 직접 만들어 국회 사무처에 전달하려 했으나 그때도 한글 이름패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지요.

자기 이름을 꼭 한자로 써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이 나라 국회의원 나리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지켜 나가려 노력하는 게 '보수'라면, 지킬 가치도 없는 것들을 끌어안고 그것을 이용해 '힘'을 만드는 게 '수구'입니다. 이 이름패 사건들은 국회에 수구 세력이 많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수구 세력들은 한글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이중적입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때 생각해 보세요. 다른 후보들보다 자신을 더 알리고 드러내기 위해 자기 선거구를 휘젓고 돌아다닐 때 그들이 어디 한자로 이름을 쓰던가요?

그들이 후보자였을 때 그들의 명함이나 홍보용 차량, 펼침막(현수막) 어디에도 한자로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자신의 이름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야 하는 후보자 신세일 때는 한자로 이름을 쓰는 일이 제 무덤 파는 짓이라는 걸 그들도 아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한글로 자기 이름을 쓰는 것을 볼 때 이들도 어떤 말글살이가 민주적이고 가치로운 것인지는 알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민주'는 다수의 구성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 구성원들이 정보를 나누는 데서 시작합니다. 아쉬울 때는 민주적인 자세를 보이다가도 그 놈의 의원 배지만 달고 나면 이런 태도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됩니다. 권력을 얻게 되면 그 권력을 근사하게 포장하기 위해 서명을 해도 한자로 해대고 명함을 만들어도 앞쪽은 한자로 뒤쪽은 영어로 '도배질'을 해댑니다. 또 이들은 메모를 할 때도 한자로 합니다.


수구 세력은 한자와 한글에 대한 반응이 자기들 이익에 따라 이렇게 철저히 이중적입니다. 수구 세력은 지켜야 할 민주적 가치보다는 지킬 필요가 없는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삽니다.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할 국민의 대표들이 제 이익과 권력에 따라 정치적 삶의 자세를 달리하면 나라가 부실하게 되고 국민들은 허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4월 2일 국군(공병 지원단과 의료 지원단) 이라크 파병 여부를 묻는 동의안이 찬성 179표, 반대 68표, 기권 9표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던 일 기억하십니까? 그때 저는 그 동의안이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을 쉬다 뉴스 화면에 나타난 엄청난(?) 광경을 보고 기절할 뻔했습니다. 이날 표결은 전자 투표로 진행됐다고 합니다. 이 투표 결과가 본회의장 전광판에 나타났는데, 뉴스 화면에 비친 그 전광판에 쓰인 글자들을 보며 저는 온몸이 저려옴을 느꼈답니다.


파병 동의안에 찬성하는 의원들 이름 왼쪽에는 푸른색 불이 들어왔고, 반대하는 의원들 왼쪽에는 붉은색 불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광판에 적힌 의원들 이름이 죄다 한자로 적혀 있는 겁니다. 그걸 보고서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지 모릅니다. 새겨놓기도 만만치 않았을 한자 전광판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세요.

파병 결정을 내린 국회 투표 결과를 보는 것만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일진대, 전광판에 그런 결정을 내린 국민의 대표들 이름들이 한자로 빼곡히 적혀 있으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그 화면이 외국 뉴스 방송에도 나갔을 텐데,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한국이 중국의 식민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뽑아놓은 국민의 대표들, 그들이 일하는 국회가 어떻게 제 나라 글자를 버리는 짓을 이렇게 마구 해댈 수 있습니까? '國'자가 새겨진 배지하며 한자 이름패하며 한자로 이름을 적어놓은 전광판하며 영락없는 '중화민국' 국회잖습니까? 내용면의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형식면도 이 모양이니 저런 국회 믿고 국민 노릇 어찌 한답니까?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국회 본회의장 의원들 이름패를 한글로 바꾸자는 통합신당 의원들을 향해 '한건주의 정치, 이벤트 정치, 튀는 정치를 중단하라'고 했다지요? 유 대변인의 말이야말로 참 튀는 발언입니다. 분당 문제로 쌓인 앙금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정치적 행위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이런 감정적인 해석을 논평이라고 내놓으면 국민들은 그런 당에 등을 돌리고 말 겁니다.

국민의 대표들이 국정을 논하는 국회에서 국민들 누구나 다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우리 글자로 이름표를 만들어 달자는 주장에다 대고 독선과 오만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논평하는 유종필 대변인이야말로 독선과 오만으로 흐르고 있는 게 아닌지 '대변인'이라는 직책을 가리고 상대방과 쌓인 앙금을 잠시만 덮어놓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수를 위하는 정치, 가진 자들을 위하는 정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위하는 정치는 민주 정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민주 정치는 다수를 위하는 정치입니다. 누구나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는 한글 사용이야말로 민주적 행위입니다. 이런 비이성적 논평은 유 대변인이 소속된 정당 이름이 '민주'당임을 부정하게 만들고 만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한자 이름패를 고집하는 의원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리할까요? 한자의 권위에 기대어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혹 동명이인 구별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유를 댈까요? 법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법을 들이밀고 싶겠지만 그것도 못 하는 형편이 아닌가요? 1948년 제정한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을 입법 기관이 지금까지 지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댈 수 있는 이유는 '관행'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 관행이 위법적이고 민주적이지도 못한 것이면 그런 관행은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 사회에 부합할 수 없는 관행을 꾸역꾸역 끌어안고 살겠다고 하는 의원들은 수구 세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잘못된 관행을 뜯어고치는 행위를 개혁이라고 합니다. 국회 구성원들이 비민주적인 관행을 못 고치겠다면 국민들의 힘으로 바꿀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의원들 스스로 민주적 정치 행태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정치판 개혁에 나설 수밖에요.

한글 이름패를 쓸 의원은 한글 이름패를 쓰게 하고, 한자 이름패를 쓸 의원은 한자 이름패를 쓰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이름패를 보면서 한글로 써 놓은 의원 이름은 눈에 많이 익겠지요. 한글 이름패 쓰는 의원들,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이름이 새록새록 다가가겠지요.

그리고 부탁 하나. 한자 이름패를 고집하시는 분들 내년 총선 때 선거 운동하면서 꼭 한자로 이름 써서 달아야 합니다. 일관성은 정치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인 거 아시죠? 한글 이름패든 한자 이름패든 의원들이 각자 알아서 선택하여 쓰도록 하면 수구 정치인들 바꾸는 개혁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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