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문학회장을 물러나며

등록 2003.10.11 10:34수정 2003.10.12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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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이후 20년이 넘는 내 문학 인생을 뒤돌아보면, 그리고 이른바 '등단'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15년 동안 (1967년 <현대문학> 장편소설 공모에서 '당선후보'에 오른 때로부터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응모 때까지) 낙방거사 노릇을 하며 산 세월을 생각하면 여러가지 회한이 없지 않다. 내 문학 인생에도 중요한 분기점들이 있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그 중요한 분기점에서 오늘로의 진로 선택에 따라 좀더 험난하고 빈약한 길을 걸어왔음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다.


5년 동안의 객지 유랑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에 내려와 거의 체념적인 상황 속에서 어렵게 집필한 중편소설 작품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심사위원들에게 깊은 고민(1980년대 초의 시대 상황과 관련하는…)을 안겨 준 끝에 내게 신춘문예 등단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을 때 나는 다시금 진로 선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고향에 몸을 놓고 살면서 '지역문학'에 헌신하며 살 것이냐, 다시금 가출을 결행하여 현실적 '실리'를 추구할 수 있는 모험을 할 것이냐를 놓고 번민을 많이 했다.

결국은 모험을 사절하고 고향에 안주하는 쪽을 선택했다. 당연히 내 실리만을 추구하며 살 수는 없었다. 고향에서 작가적 방식으로 지역 정신문화를 가꾸고 풍미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1년 <흙빛문학회>을 창립하고, 1983년 대전을 제외한 충남에서는 조치원의 <백수문학> 다음으로 두 번째 본격적 종합문예지가 되는 <흙빛문학>을 창간한 것은 내가 있었기에 더욱 가능했다는 생각을 갖는다.

어느 단체나 초창기 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기 마련이지만, 흙빛문학을 만들고 키우는 그 과정에는 참으로 눈물겨운 일들이 많았다. 거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갖가지 사연들을 기록하고 있는 나의 '자전 에세이' 「십년 세월의 마루턱에 서서·②」(흙빛문학 제20집, 1994년 상반기호)를 읽어보면 지금도 가슴이 아릿해진다.

나의 온갖 고뇌와 노고와 애정이 함축되어 있는 흙빛문학을 떠나게 된 1994년의 사정들(1999년에 어떤 특별한 계기로 기록을 했지만 1994년으로부터 10년 후가 되는 2004년 <태안문학> 봄호에 발표 예정)도 회고를 해보면 내가 지금까지 간직하며 살아온 문학과 고향에 대한 진정한 애정의 실체와 어떤 성격 같은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흙빛문학을 떠난 후 햇수로 5년이 되는 1998년에 <태안문학회>를 만들고 <태안문학>을 창간한 것은 고향에 대한 작가로서의 '의무감' 같은 것이 더욱 크게 발동한 탓이었다. 내가 창안한 것이긴 하지만 흙빛문학의 '흙빛'이라는 이름은 가치 지향적 문학정신을 구현하기에는 참으로 의미 있는 이름이로되 지역성을 표방할 수는 없다는 점, 흙빛문학은 제3집 때부터 태안과 서산을 함께 아우르는 문학지로 발전한 데다가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서산에 적을 두고 있는 사실 등을 깊이 인식한 탓이기도 했다.

흙빛문학 탄생 이후로 거의 모든 시·군단위 고장들에서 문학지가 속속 탄생하는데, 한결같이 그 고장의 현재 지명이나 옛 지명, 적게는 대표적인 고장 명물을 제호로 내거는 현상에서, 이러다가는 우리 태안만 고유 문학지가 없는 고장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일종의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태안문학을 시작하고 운영하면서 문학의 진정한 가치, 문학(아울러 정신문화)에 대한 진실한 애정과 사명감, 그리고 향토애의 실체적이고도 참다운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나름대로 깊이 고뇌하고 모색하면서 참으로 각고의 노력과 열정을 쏟았다. 허실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가시적인 많은 성과들을 얻었다고 자부한다.

지난 5년 동안 <태안문학>을 열 번 발간하고, 회보 <태안글밭>을 여섯 번 발행하고, 대외적인 큰 행사를 네 번 치르는 동안 많은 애환도 얻게 되었다. 한숨과 눈물과 감사지정, 그 외 갖가지 체감들이 백화산의 낙조봉 만큼은 내 가슴에 자리하게 된 것 같다. 내 손으로 도합 아홉 명의 문인을 한국 문단에 등단시킨 것도 보람 있는 일로 생각된다.

과거 흙빛문학 회장을 하면서 일찌감치 제10집까지만 만들고 회장에서 물러나겠다는 공언을 했고 그것을 실천했다. 마찬가지로 태안문학 회장을 하면서도 10집까지만 만들고 회장을 그만두겠다는 공언을 일찌감치 했고 드디어 그것을 실행했다.

흙빛문학 때와는 달리 태안문학의 경우에는 불안 요소들이 많고 일거리도 무척 많아 걱정과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바톤을 받은 새 집행부의 의욕이 충만하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회장에서 물러난 사람은 운전석 옆에서 좀 떨어져서 잘 동승만 하면 된다.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되, 그것과 간섭의 경계를 잘 살피는 것이 옳은 처사일 터이다.

태안문학회장을 물러나면서 특히 후원회원님들께 깊이 감사한다. 지금까지 748명의 독자님들이 후원회원으로 참여해 주셨고, 후원회비 적립금액이 3천만원을 넘게 되었다. 후원회원님들 중 절반 정도는 태안지역 밖에서 사시는 분들이고, 또 절반 정도는 우리 태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들이다. 이분들께는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나는 고향에서의 작가로서의 헌신적 사명은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작가로서의 위상과 작품 업적으로 고향의 명예를 키우는 일이 최선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어언 50대 중반의 세월을 살고 있다. 나머지 생애는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하여 작품 업적을 쌓는 일에 바치고 싶다.

지금까지 태안문학회장직을 수행해 오는 동안 적극 동참 협조해 주신 회원 여러분께, 아울러 깊은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지역사회 및 고장 밖의 문학애호인 여러분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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