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문 앞에서 강의를 하다 ①

등록 2003.10.14 07:52수정 2003.10.14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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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 추동 마을에는 꽤 덩실하게 보이는 정려문(旌閭門)이 하나 있습니다. 도로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니 연포나 안흥을 오가는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있는 정문이지요.


저의 8대조이신 지시정(池時淨) 할아버님과 소주 가씨(蘇州 賈氏) 할머님의 효열(孝烈)을 기리는 정문이랍니다. 이 효열정문이 이곳에 처음 세워진 때는 지금으로부터 214년 전인 영묘(英廟) 기유(己酉)년, 즉 정조 재위 13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서기로 계산하면 1789년이 되지요. 이 효열정문은 저희 조상이신 지시정 효자님과 소주 가씨 열부님의 효열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만, 이 정려문에는 매우 귀중한 가치와 의미가 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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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부부가 함께 효자와 열부로 가상(嘉賞)된 합문(合門)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매우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은 왕명에 의해 나라에서 세워준 정문이라는 점입니다. 이 또한 별로 흔치 않은 경우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에서 세워준 정문이라는 것은 현판에 새겨진 작호와 벼슬 이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군수나 관찰사 등 고을 수령이나 지방 관장이 세워준 정문에는 작호와 벼슬 이름이 새겨지지 않습니다만, 이 정려문에는 '가선대부 겸 동지의금부사'라는 작위와 벼슬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고장에도 효자비와 열녀각 등이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왕명에 의해 나라에서 세워준 정려문으로는 이 정문이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나라에서 세워준 정문인 데다가 부부가 함께 효자와 열부로 가상된 합문이기 때문에 그 귀중함 만큼 이 정려문은 오랜 세월 마을의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지금이야 효자 열부에 대한, 그리고 정려문에 대한 가치 인식이 퇴락할 대로 퇴락했습니다만, 옛날 미풍양속과 예의범절이며 효행 열부지덕을 숭앙하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이 아끼고 우러러 보는 대상이었지요. 옛날엔 이 정려문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오갔고, 벼슬아치나 양반 부녀자들도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서 걸어 지나갔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귀중한 정려문이었기에 214년 전 처음 건립이 될 당시 마을의 큰 행사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곧바로 공적인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을 원님이 세워주는 열녀비 하나도 크게 공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거늘, 하물며 나라에서 세워주는 효자 열부 합문이었으니, 그 공적인 의미가 얼마나 지대한 것이었겠습니까.

214년 전에 최초 건립된 이 정려문은 그 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흥선대원군 시절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작호를 지니신 저희 증조부 님에 의해 일차 중건이 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80여 년이 흐른 지난 1967년, 저희들의 바로 위 선대이신 어른님들에 의해 이차 중건이 이루어지면서 전통 양식이 아닌 새로운 형태, 즉 서울 독립문을 본뜬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려문의 규모가 너무 왜소하다는 것과 전통 양식이 아닌 데서 오는 이질적인 느낌이 없지 않아서 30여 년이 흐른 지난 1999년 봄 다시 전통 양식을 복원하는 공사를 오늘의 후손들이 시행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30년 전에 차후 후손들에게는 중건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콘크리트로 정려문을 축조했던 선대 어른님들의 깊은 마음과 진취적인 감각을 되새기며 보존하기 위한 의미로 그 콘크리트 구조물을 그대로 살리고 그 위에 전통 양식을 복원 건립하는 방안을 채택하였답니다. 그래서 사진으로 보시다시피 제법 우람한 정려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번이 도합 삼차 중건이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삼차 중건 공사를 마친 우리는 1999년 4월 5일 윤형상 당시 태안군수님을 비롯한 지역 기관장, 유지, 일가들과 현지 주민들을 모신 가운데 '효열정문 중건낙성 기념'이라는 이름의 행사를 가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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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행사를 기획할 때는 정려문에 결부되어 있는 공적인 성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지만 그러나 결코 그것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랍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만, 지금은 효자와 열부, 정려문의 가치 인식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 것에서 우리가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태나 풍조에 대해 안타까움을 지니기만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조상님들의 효열 정신을 기려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조상님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었지요.

오늘의 세태에서 조상님들의 효열을 기리는 정려문을 많은 돈을 들여 중건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생각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일에는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향수와 점점 망실해 가고 있는 미풍양속 예의범절에 대한 그리움과 고수 의지가 농축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행사에는 공적인 성격이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 행사는 단연코 우리 집안만의 행사일 수 없고, 우리 조상님들을 기리고 자랑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요.

거듭 말하자면, 우리 정려문의 중건과 낙성식 행사는 오늘의 혼탁한 사회에서 이 땅의 모든 조상님들의 효열 정신을 이어받고 지켜 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의 외침이요, 몸부림이기도 할 터였습니다.


정려문의 정(旌)자는 '기정'으로 불리는 글자입니다. '깃대 끝에 새의 깃으로 장목을 꾸민 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글자지요. 그리고 려(閭)자는 '마을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정려'라는 말은 곧 '마을의 기'라는 뜻이 됩니다. 마을의 명예와 자랑거리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거지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의 집 문 앞에 세운 붉은 문'을 일컫는 정려문. 마을의 큰 자랑거리였던 정문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오늘에도 각별히 '효열(孝烈)'의 상징으로 받들며 살고 있는 우리는 나라로부터 효자와 열부로 가상되신 조상님들의 후손다운 삶을 살며 매사에 옳은 처신을 하려고 나름으로는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지요. 나는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기에 우선은 '신자다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효자와 열부의 삶을 살았던 조상님들에 대한 자손으로서의 의무감 같은 것도 비교적 많이 의식하는 편입니다. 남들에게 내 조상님들의 효열정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나부터 옳은 처신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곤 하지요.

아무튼 내 조상님들의 효열정문을 모시고 있고, 또 그 정문으로부터 10리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 덕에 나는 가끔 그곳으로 달려가서 많은 어린이들에게 '효행 강의'를 하곤 합니다.

종종 군내 초등학교들에서 '현장 학습'의 하나로 정려문 답사 견학을 실시하면서 내게 강의 요청을 해오곤 하지요. 때로는 바쁜 일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하지만, 나는 일단 그런 요청을 받게 되면 큰 기쁨을 느낍니다. 내 조상님들 덕택에 많은 어린이들에게 어떤 실질적인 분위기 속에서 효행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 각별한 기쁨을 안겨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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