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앞둔 고딩들의 교실

등록 2003.10.19 23:13수정 2003.10.2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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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까지 D-16일

무심코 보니 우리 반 칠판 아래 붙어있는 D-DAY달력이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이를 보고 ‘아니 벌써?’라는 말이 은연중에 나온다.

날씨는 또 왜 이리 추워지는지, ‘추워!’라는 신음 섞인 탄성을 내 뱉기 일쑤인가 하면, 교실에서는 감기에 걸린 친구들이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로소 수능이 가까와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점을 다른 친구들도 뼈저리게 알아서인지, 이제는 수업시간에 자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들 공부에 열심이다.

선생님들도 이런 교실의 분위기를 간파하시고 힘내라면서 수업시간마다 우리가 지금 있는 자리를 거쳐 간 선배들의 이야기를 해주시곤 한다. 그리고 수능 대비 전략을 소개하시느라 매 시간 프린트물을 안고 오는 노고도 마다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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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훈

“자아, 프린트물 다 받았지? 이제 진짜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내가 출제 위원은 아닌 이상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대충 수능에 어떤 작품이 나올 수 있을 지 보자. 1페이지 가봐. 지금까지 수능에 나올 만한 거(?) 다 나왔는데 이건 아직 안 나왔거든? 그러니까 이번 수능에 나올 수도 있어. 꼭 정리들 해 놔라.”

“선생님 거 안 나와요(자칭 출제위원 주연이가 나서자 교실은 야유 섞인 웃음이 터진다).”
“그래? 그럼 뭐가 나오는데 네가 짚어봐라, 참나.”


“속미인곡 꼭 나와요.(웃음) 그리고 천승세의 <만선>하고, <허생전> 하고 꼭 나와요.”

“그래. 얘가 나온다니까 진짜로 나오겠지 뭐. 한 번 보자고. 그건 그렇고 <속미인곡>은 정말 중요해. 꼭 체크해 놓고. 박인로의 <선상탄>하고, <누항사>도 중요하다.”


이렇듯 몇몇 과목에 대해서 직접적인 대책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계시는가 하면, 수능 날, 수능장의 상황을 가정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일러 주시는 선생님도 계신다.

“자기가 일단 수능 보러 가면 말이다, 쉬는 시간마다 무조건 화장실에 가야 한다. 안나오면 쥐어짜서라도 꼭 일 보고.(일동 웃음) 아냐 진짜 그래야 한다니까, 긴장하면 어떻게 될지 몰라.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여하튼 의무적으로 꼭 가라.

그리고 1교시 끝났다고 절대 친구들하고 답 맞추려 하지 말고, 자기가 정리해 놓은 거 한자라도 봐라. 그게 남는 거니까. 아, 마지막으로 1교시 언어영역 망쳤다고 집에 간다고 울지 마라. 다른 과목 보는 대학교도 많다(웃음).”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제 쉬는 시간의 대화거리는 주로 수능에 대한 것들이 많다. 대학에 대한 정보교환은 기본이요, 수능에 대한 ‘믿거나 말거나 비기(秘記)’도 주요 화제다.

이를테면 ‘수능에 나오는 답 가운데 여태까지의 통계를 살펴보면 4번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은 3번이다’라는 것. 혹은 ‘OMR답안지의 특성상 답이 지그재그 형으로 기재되어야 채점하기가 편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지그재그 형으로 답을 써야 많이 맞는다’라는 말들이 있다.

그 밖에도 수리영역 맨 마지막 문제는 그 답이 ‘.25’나 ‘.75’가 되는 것이 많다든가, 지문 중 ‘모두, 반드시’같은 단정적 어휘가 들어가면 대개 틀릴 가능성이 큰 답이다 등등…….

분명 자기가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주어져야 하건만, 우리에겐 이른바 ‘인생이 걸린 문제’가 되다 보니까, 믿거나 말거나의 비기를 동원해서라도 한 문제라도 더 맞추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수능을 코앞에 둔 고딩들의 교실은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나 오직 수능시험에 대한 열기로 식을 줄을 모르고, 시간이란 녀석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무심히도 제 갈 길만을 재촉하고 있었다.

수능이 끝나길 고대하는 마음

수능이 다가옴에 따라서 그날을 위해 고생했으니 자기 점수보다 조금만 많이 나와 달라고 기대하고, 대개는 그래서 긴장하게 된다고 토로한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그것이 끝나기만을 고대하는 마음도 있다(개인적으로 평소에 잘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과 그러한 것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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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훈

“야, 너 수능 끝나면 뭐 할 거냐?”
“당연히 놀아야지. 플스방 가서 그간의 회포를 풀어보련다.”
“모야, 부루 마블, 피씨방, 축구는 버리겠다는 거냐?”
“아, 깜빡했다. 당연히 그것도 하고 놀아야지.”
“그때 되면 밤 새워서 놀까?”
“그래. 정말 원 없이 놀아보자.”

솔직한 말로 수능시험을 앞두었다고 해서 하루도 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다 노는 그 하루는, 놀면서도 마음은 부담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능이 끝나 아무런 부담 없이 놀 수 있을 날을 바라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자기는 꼭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고 하는 치들도 있었으며, 그밖에도 그간 억눌려 왔던 두발에 대한 자유를 부르짖는 치들도 있다.

“아 나 진짜, 수능 끝나면 이런 머리(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하지 않으련다.”

“나도. 내 머리 중학교 때부터 안 바뀐 거 아냐? 사람들이 이상한 게 자기 머리도 아니면서 내버려 두질 않는다. 그래서 결심한 게 수능 끝나면 과감히 파마 하려고.”

“웃기네. 파마하려면 네 상태에서 엄청 길러야 할 걸.”
“맞아, 그리고 너는 보는 사람의 괴로움은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심산 인가 본데 착각하지 마 제발. 어울리는 머리를 하시지.”(웃음)
“이 녀석들이 그러고도 친구라고…….”

수능이 끝난다면 무궁무진한 놀이와 그간 억눌려 왔던 많은 것들을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꼭 이루고 싶다는 마음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을 이루겠다는 희망을 이야기 하면서도 다를 마음 한구석에는 ‘그것이 무리일지도 몰라’라는 생각도 품고 있지는 않을까.

우선 희망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수능 결과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부모님들과 주위 사람들의 높기 만한 기대에 많은 부담을 가진 친구들. 그네에게 자유는 노력여하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 그 결과를 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류의 것인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되지 않는다면 재수를 하는 방법을 찾는 친구들이 생길지도 모르고, 아예 자주 볼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것.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이야기 했던 달콤한 말들은 그야말로 공염불이 될 터다.

그래도 그것은 수능이 끝났을 때, 최악의 상황일 때를 가정했을 때의 문제이고 지금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수능에 대한 아주 많은 부담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큰 것은, 수능이 끝나고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우리가 머물던 교실을 저학년들보다 일찍 나올 수 있다는 기쁨 섞인 희망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직까지도 희망을 이야기 한다.

사실 우리는 수능이 끝나 즐겁기만 한 하루를 보내게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견뎌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수능 날의 커다랗고 무거운 하루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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