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3

등록 2003.11.21 14:37수정 2003.11.2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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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누군가가 그녀 등에 손을 올렸다. 닌후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한 동료가 허리를 구부리고 밖으로 나가보라고 속삭였다. 입구로 나가자 여사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사제장님이 부르신다. 어서 가보렴."


닌후는 기뻤다. 사제장이 부른다면 좋은 징조일 것이었다. 대사제장은 신의 매개자로 신성한 결혼식을 집전했다. 그것은 전통이었다. 정월 초하룻날, 신년을 알리는 연주가 시작되면 노래와 춤이 뒤를 이었고 한바탕 춤이 어우러지고 나면 사제장이 조용히 나가 연단에 술잔과 향료를 놓았다.

'신성한 결혼식'은 사제장의 그 의식으로 시작되었고 그와 동시에 왕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날 왕은 훌륭한 예복에 머리에는 가발 같은 왕관을 쓰고 있었다. 금관이 아닌, 그저 왕관을 쓴 것은 그날 왕은 이비 신이 아닌 목자 신이신 두무지여야 했던 때문이었다. 두무지 신은 본래부터 이난나의 남편이었다.

그날은 그녀 또한 닌후라는 하잘것없는 여사제가 아니라 그 열정적인 여신 이난나였고 또 그렇게 치장을 했다. 자신에게 걸쳐진 긴 비단 드레스는 얼마나 눈부시던지 그녀가 보아도 황홀했다.

두 신랑 신부가 마주하면 사제장이 술잔에 혼배 술을 채웠다. 이비 신은, 아니 두무지 왕은 그 잔을 들어 이난나 여신에게 바치며 간청했다.

'여신 이난나여, 풍요가 넘치는 당신의 젖가슴, 초목과 곡식이 울창한 당신의 대지를 나에게 주소서. 나 또한 암소와 양들의 우유로 내 백성들을...'


닌후는 남자 사제관 입구, 그 종려나무 길로 들어섰다. 인적이 없었다. 문득 걱정이 찾아왔다. 나라가 위급하다고 기도를 하라면서 왜 대사제장은 나를 찾는가? 희소식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여사제장이 먼저 경배실에서 발표했을 것이다. 한데 그러지 않고 그저 오라고 했다면 그것은 호출일 수도 있었다. 왜인가? 왕과 결혼한 사제니까? 왕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왕비에게 알리듯이 그녀에게도 그 어떤 비보를 알려주기 위해서인가? 아니, 아닐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라 해도 여사제장이 먼저 공개했을 것이다.

그녀는 걸어가면서도 계속해서 자문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무엇이? 내가 왕과 '신성한 결혼식'을 올렸던 것은 국법이었다. 나는 그저 선택되어진 것일 뿐이었다, 운 좋게도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 선택에 값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흘간의 모든 절차를 충실히 이행했고 그리고 여신이 줄 수 있는 그 모든 풍요를 왕에게 드렸다.


들녘에서 곡식 제를 올릴 때 나는 왕의 국부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그때도 여신의 주문을 잊지 않았다.

'커지거라, 커지거라, 하늘만큼 커지거라. 그리하여 너 억만의 생명을 내 자궁에 쏟아부어라...'

왕의 국부는 황소보다 더 커졌고 그리하여 6단 주름치마가 부풀어 올랐고 나는 나의 침대로 그를 안내했고 왕은 사자 같은 포효를 지르며 억만의 생명을 내 자궁에 쏟아 부었다.

왕은 새벽까지 내 침실을 떠나지 않았다. 왕의 국부는 마치 멈출 줄 모르는 강줄기 같았다. 억만의 생명을 쏟아 넣고도, 또 그렇게 쏟아놓고도 그것은 황소의 그것처럼 다시 일어나 씨뿌릴 곳을 찾았다.

신랑이여, 당신의 애무는 꿀보다 달콤합니다.
침실에는 향긋함이 가득하고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에 푹 취해버렸습니다.
사자여, 당신을 어루만지게 해주소서.
나를 애무해주소서...

닌후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사제관 앞이었다. 곧장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별안간 두 다리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두려움이, 공포보다 무서운 그 어떤 두려움이 두 다리를 친친 감아댔다.

'그러나 들어가야 해. 빨리 들어가 봐야 해. 어쩌면 좋은 소식이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사제장을, 그 훌륭하신 분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닌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사제장의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닌후는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도서관과 공예품 작업장을 지나 사제장실 앞에 섰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은 뒤 조용히 문을 두들겼다. 응답이 없었다. 다시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닌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사제장은 책상에 앉아 점토판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문서인지 닌후가 들어가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가끔 쐐기형 갈대 촉에서 긁혀 나오는 점토 지저깨비를 입으로 훅 불어낼 뿐이었다.

닌후는 가만히 선채 주위를 살펴보았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이 방은 참으로 검소했다. 여사제장 실이 온갖 장식품으로 치장되어 있음에 반해 이방은 벽돌 바닥에 삼나무 책상이 전부였다.

일반 도시민들은 사원 장인들이 수많은 공예품들을 만들어 수출하고 있고, 그래서 사제관이 호화로운 생활을 할 것으로 상상하지만 이 사제 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운영방식은 대단히 명료해서 그 수익금을 종사자의 급료나 신전 유지, 사제들의 필경학습과 도서관에 썼고 회계사에게 항상 그 내역을 기록해두도록 했다.

마침내 대사제장이 갈대 촉을 놓았다. 필경이 끝난 모양이었다. 그는 점토판을 한 옆으로 밀쳐둔 뒤 비로소 닌후를 쳐다보았다. 노인의 표정이 너무도 어두워 보여 닌후는 그만 훅, 숨을 들이켰다.

"닌후 사제, 정직하게 대답해주어야 하네. 그러겠는가?"
사제장이 입을 열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닌후도 나직이 대답했다.
"듣기에 요즘 식사를 잘 하지 못한다고..."

그것은 상상했던 질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염려하는 소리였다. 닌후는 용기를 얻고 얼른 대답했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내가 묻는 뜻은 그게 아니네."
"네, 잘 알겠습니다."

닌후는 허둥지둥 대답했다. 사제장이 다시 물었다.

"식사를 잘 하지 못하고 독서도 등한이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부터 독서도 잘 하겠습니다."
"닌후 사제, 그건 정직한 대답이 아니네."

닌후는 대사제장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손을 꼭 쥐고 확실한 질문을 해달라는 듯 사제 장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대사제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식사도 독서도 등한이 한다면... 그건 그대에게 태기가 있기 때문인가?"

닌후는 깜짝 놀라서 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달마다 같은 날에 이난나 여신은 저에게 그것을 가져다 주십니다. 저는 기꺼이..."
"그러니까 왕의 흔적이, 그 어떤 흔적도 없단 말이지?"
"네, 그러하옵니다.
"그럼 안심이네. 이만 돌아가게."

사제장이 꼭 확인해야 할 것은 그것이었다. 만약 닌후에게 태기가 있다면 그의 마지막 임무는 닌후의 보호가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닌후는 왕의 씨앗을 가지지 않았다. 작년에 뽑혔던 여사제도 마찬가지였다. 사제장은 잠깐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허공에 물어보았다.

'그것이 이난나 여신의 뜻이었던가?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허공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자신도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해서 앞을 바라보는데 거기 닌후가 아직도 그렇게 서 있었다.

"왜 돌아가지 않는가?"

그제서야 닌후는 쫓기듯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그 누구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안심이 되었다. 자신의 허둥대는 모습을 아무에게 보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조용조용 복도를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사제장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왕은 정녕 어떠하신가. '신성한 결혼식'뒤 서한까지 보내주셨는데, 그 자랑스럽던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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