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21

등록 2003.12.20 12:35수정 2003.12.2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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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초닷새 날 이른 아침이었다. 에인은 어전으로 들어섰다. 태왕께 개인적으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주렴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태왕은 의관을 정제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마, 밤새 잘 주무셨나이까?"
에인이 절을 올리며 말했다.
"오냐, 너도 잠은 잘 잤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기분은 어떠냐?"
"평온하옵니다."
"먼 길을 출행하는데도 그저 평온하다는 말이냐?"
"출행은 이미 저의 길이옵나이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런 말이냐?"

태왕은 아직도 걱정이었다. 혹시라도 에인에게 출행을 꺼리는 마음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던 때문이었다. 에인이 대답을 했다.
"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소도 대제 뒤부터 이렇듯 평온해졌나이다."
"오, 그래…. 그 평온함을 내게 표현해볼 수 있느냐?"

태왕은 그와 좀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렇게 물어보았다. 에인 역시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 잔잔한 물과도 같사옵니다."
"바람도 없는 그런 강물 같다는 말이냐?"
"너무 잔잔해서 바람도 돌도 침투되지 않을 그러한 물과도 같사옵니다."

바람도 돌도 침투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늘이다. 호수로 보이는 하늘이다. 에인이 벌써 하늘의 호수를 보았고 그 마음을 닮아 있다는 뜻이다. 어떤 운명이 닥쳐도 흔들림 없이 곧장 나아가거나 항상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징표다.

태왕의 얼굴에도 채운이 감돌았다. 청년에 대한 감동이었다. 이 아이는 참으로 많은 것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자신 역시 수차례 천제를 집전했고 신족으로 등록을 했으나 꿈에서 외엔 접신의 경지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한사코 공부에 매달렸고, 그럼에도 삼십이 넘어서야 겨우 이치에 대한 경지를 얻었던 것인데 이 아이는 절로 나아가고 있다. 신이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 말을 명심해서 듣거라."
태왕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에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귀를 기울였다. 태왕이 뒤를 이었다.

"먼저 '딛을 문'을 되찾거든 그 땅을 미련 없이 제후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알고 있느냐?"
"예,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면 그 뒤엔 어떻게 하겠느냐?"
"당장 귀국할 것이옵니다."
당장 귀국한다고? 너는 아마 그러하지 못할 것이다. 태왕이 다시 물었다.

"만약 힘이 생겨 타국도 차지할 수 있다면 그땐 어떻게 하겠느냐?"
"딛을 문만 찾아주면, 저는 그 즉시 돌아올 것이옵니다."
"신족에게는 자기를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어떤 지시의 힘이 따로 있단다. 그 지시의 힘이 네가 바라지 않는 길로 이끌어갈 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땐 어떻게 하겠느냐?"


"마마, 저는 신조도 오룡거도 여기서 보았사옵니다. 그것은 어서 돌아와 마마의 뜻을 받들어 이 나라를 잘 지키라는, 그런 뜻임을 믿어 의심치 않사옵니다."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다만 그러나 네가 본 것은 하늘이 아니더냐?"

에인은 무슨 말인가 싶어 가만히 태왕을 쳐다보았다. 태왕이 뒤를 이었다.
"신조가 날았던 곳도 하늘이요, 오룡거를 본 것도 하늘이거늘…."
"……."
"한데 그 하늘에 장소가 있더냐?"
"마마, 소인이 미련해서 무슨 말씀이온지 모르겠사옵니다."
"하늘에 장소가 없다는 것은 우리들이 머물러 있는 이곳만이 동이족의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건 알고 있사옵니다."
"알고 있다고?"
"환족은 10개국의 나라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마다 지역이 다르고 또한 하늘도 다를 것이옵니다."

태왕은 생각했다. 그래, 그 정도만 알면 되었다. '딛을 문'의 하늘 또한 멀리에 있고 그쪽 하늘의 호수도 넓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들이 너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태왕은 비로소 옆에 두었던 함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나무로 짠 너비 한자 가량의 조그만 함이었고 그 위에는 허름한 마포가 둘둘 감겨져 있었다.
"자, 가까이 와서 이것부터 받아라."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에인이 함을 받아들며 물었다.
"그것은 늘 너의 침소에 있어야 할 물건이다. 내 말은 항상 네 몸 가까이 두어
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인지 지금 열어봐도 되옵니까?"

허름한 천으로 묶인 것이 귀한 것은 아니다 싶어 그렇게 물어보았다.
"아니 된다. 그것은 아주 단단히 봉해져 있다. 그러니까 '딛을 문'을 정벌한 이후까지는 절대로 열어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귀국할 때 열어보나이까?"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된다. 그러니까 그때 열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내말 알겠느냐?"
"예, 마마."
"누가 탐내지 말라고 허드레처럼 묶었다. 그러나 너에겐 아주 귀한 것이다. 잃어버리거나 도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잘 지니고 다니거라."
"명심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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