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자라면 제 갈길을 찾아간다

대안중학교 마지막 전형 '예비학교'에 들가가는 새들이

등록 2003.12.28 15:15수정 2003.12.2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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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6-7일 만인산 수련원에서 전국 귀농인 송년의 날 행사에 함께 갔었다. 새벽 등산을 하면서 수련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지난 12월 6-7일 만인산 수련원에서 전국 귀농인 송년의 날 행사에 함께 갔었다. 새벽 등산을 하면서 수련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전희식

새들이가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오늘부터 3일간 하는 내년 신입생 대상의 '예비학교'에 참석하기 위해 오전에 집을 떠났다. 지난 10월과 11월에 걸쳐 1차 서류전형과 2차 학부모 면접을 통해 20명의 학생을 뽑았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예비학교를 거쳐 13명의 신입생을 뽑는다고 한다. 올해 마흔 몇 명이 지원을 했으니 경쟁률을 따지면 3:1이 넘는다.


나는 집에서 새들이를 트럭에 태워 전주 터미널까지 데리고 가면서 예비학교에서 볼 시험 예상문제를 여럿 내서 새들이가 대답하도록 했다.

"새들아 아빠를 존경하는 이유 서른 가지를 말 해봐라."
내가 첫 번째 예상문제를 냈다.

"선생님이 그렇게 물으시면, 제가요 아빠 '서른 개만 말해야 돼요? 오십 개 말하면 안돼요?'라고 대답 해 드릴게요."

나는 "통과통과"라고 하고는 두 번째 예상문제를 냈다.

"신입생 뽑는데 외모를 크게 본다고 하던데 선생님이 새들이 너는 왜 그따위로 생겨 먹었냐고 하면 너 뭐라고 할래?"


그러자 새들이는 말한다. "일단요, 죄송하다고 선생님한테 사과드리고요, 아빠 닮아서 죄송하다고 솔직하게 말할게요."

나는 세번째 예상문제를 내려다 그만두었다. 좀 진지하게 대답해 보라고 나무랐지만, 새들이는 자기는 정말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이라고 우겼다.


"너 지금 떨어질까 봐 긴장하고 있지?"
"아뇨.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그럼. 뭐 설레임 같은 것도 없어?"

"그냥 그래요. 근데 저 너무 일찍 가는 거 아녀요?"
"아냐. 가는데 두 시간 반은 더 걸려. 내가 마지막으로 예상문제 낼 테니 잘 들어봐라."
"좀 어려운 걸로 내세요."

"너 남원에서 인월까지 갔다가 인월에서 버스를 뭐 타야 되냐?"
"사람들한테 물어보죠 뭐."
"아침에 누나가 잘 가르쳐 주더만 그새 다 까먹었니?"
"아뇨.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돌다리도 두드려 가며 건너라는 말이 있잖아요."

"알았다. 길을 묻더라도 잘 아는 사람한테 물어봐라. 근데 잘 아는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아 볼 거니?"
"됐어요. 됐어요. 터미널 다 왔네요. 내려줘요."

'예비학교' 앞두고 새들이가 법썩을 떨고 있는 요리 연습
'예비학교' 앞두고 새들이가 법썩을 떨고 있는 요리 연습전희식

어느새 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왔다. 나는 뭔가 좀 그럴 듯하게 헤어지고 싶었다. 중학생이 되려는 아들 혼자 먼 길을 떠나보내려니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휙 가버리는 새들이를 불러 세워서 악수를 청했다.

"장난 심하게 치지 말고, 설거지나 청소 열심히 하고, 여학생들 많으니 아침에 세수 꼬박꼬박하고, 일어나면 일단 이불부터 개라"고 했다. 어이가 없는지 새들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내 말을 이렇게 받았다.

"밥 남기지 말고, 이빨 잘 닦고, 아빠처럼 방귀 아무데서나 뿡뿡 뀌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놀다 올게요. 저 지금 어디 캠프 놀러가는 그런 기분이에요. 걱정 마세요 아빠. 이제 들어가세요."

새들이가 버스 터미널 속으로 사라지고 나니 새삼 날씨가 차가워지는 것 같아서 옷을 더 껴입힐 걸 그랬나 싶어졌다. 사실 새들이는 불합격해서 가고 싶은 실상사 작은학교 못 가면 어쩌나 싶은지, 방학이라서 집에 온 누나에게 자꾸 물어 봤다. 예비학교에서 누나 때는 뭐하고 지냈는지도 궁금하고 뭘 잘해야 되는지 모르겠다면서 공부도 잘 해야 하냐고 은근히 자기가 제일 취약한 것을 물었었다.

공부도 조금 물어 본다고 누나가 말했더니 얼굴빛이 당장 달라져 가지고, 그동안 학교에 가방을 처박아 두고 빈손으로 덜렁덜렁 다니더니 어둑발이 지기 시작한 저녁인데도 당장 책가방 가져 와야겠다고 했다. 저녁도 못 먹고 학교까지 가서 책가방을 가져왔다.

김장무우에 목초액을 뿌려주고 있다.
김장무우에 목초액을 뿌려주고 있다.전희식

며칠 동안은 틈만 나면 책을 펴 놓고 평소 건성으로 지나간 대목들을 누나에게 물었고 원래 공부를 잘하는 새날이는 동생에게 개인가정교사처럼 가르쳐 주었다.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는 남매 모습이, 배우는 새들이도 그렇고 가르치는 새날이도 어찌나 정겹고 진지한지 보기 흐뭇했다.

도형의 표면적과 부피를 구하는 수학을 공부하는데 새날이 설명이 아주 훌륭했다. 명료하고 조리 있는 설명이 듣는 사람 기분까지 명쾌하게 하는 수준이라, 이 녀석이 그동안 덩치 뿐 아니고 사고력이나 표현력이 많이 자랐구나 싶었다. 곁눈질로 남매를 훔쳐보던 나는 가슴이 찡해지기까지 했다.

두 주쯤 전. 새들이가 1주일동안 컴퓨터를 안 하겠다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컴퓨터 숙제가 있어도 꼭 1주일만 안 하겠다는 것이었다. 학교 컴퓨터 시간에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컴퓨터를 안 하겠다는 새들이 다짐이 대견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새들이는 아무 갈등 없이 도리어 재미있게 한 주를 컴퓨터 근처에도 안 가고 잘 지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티브이를 보는 것으로 시간을 즐겼다.

어느 땐가 나는 마음을 내면 그 자리에서 산뜻하게 결단하고 잡념 없이 실천하는 새들이 모습을 발견 했었다. 이때부터 나는 깊은 마음으로 새들이를 주시하게 되었다.

'저놈이 전북 부안이랑 지리산 실상사로 보따리 학교 갔다 온 이후부터 저랬나? 아냐 창원 하늘땅학교 견학 다녀 온 후부터 저랬지 아마?'

부쩍 큰 것 같은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모들이 느끼는 대견함 반 아쉬움 반인 그런 기분이 들었다.

지난 달 실상사 보따리학교에서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새들이가 차 속에서 난데없이 "이제 컴퓨터 게임 안 할래요" 할 때 나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새들이의 결심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새들이의 그런 선언의 동기가 석연찮고 불 분명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불신했다는 건 아니고 그냥 가볍게 흘려들었다는 것이다.

며칠 뒤 새들이가 "아빠, 학교 친구들이 제가 컴퓨터 게임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하고 있는 걸 믿으려고 하지를 않아요"라는 말을 할 때야 새들이의 그 '선언'을 떠올렸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새들이는 근 두 달을 컴퓨터 게임을 전혀 안 하고 지낸다. 아예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

새들이가 실상사 작은학교에 원서를 내고 1차 합격을 한 지금의 상황도 전적으로 새들이 특유의 '산뜻하고 깔끔한 결단! 그리고 사념 없는 집중!'이 일궈 낸 공로(?)라고 할 수 있다.

지난 가을 햇살 좋은 날 뒷산에 있는 절에 우리집 '금이'랑 산책 갔었다.
지난 가을 햇살 좋은 날 뒷산에 있는 절에 우리집 '금이'랑 산책 갔었다.전희식

우리 집에서 새들이를 일반 중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내 의견이 우세했던 것이다. 새들이와의 의논도 여러 차례 진지하게 거쳤다. 새들이는 부모(특히 아빠)의 그런 결정 배경과 동기를 깊이 이해했고 동의했다. 그러나 '이해와 동의'와는 별도로 그런 집안의 결정을 전제로 자기는 자기 나름의 선택을 한 것이 바로 '학교 안 가겠다'는 것이었다.

새들이는 '길동무(refarm.or.kr)' 친구들과 속마음을 나누면서 홈 스쿨 쪽으로 마음을 정해가고 있었다. 새들이가 집안의 결정과는 별도로 길동무의 '보따리 학교'에 집중하고 스스로 일반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나름의 결단을 보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나는 길동무 게시판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 지역 일반중학교와 실상사 작은학교 입학원서 마감 전날 밤에야 이 사실을 알고 우리는 홈 스쿨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를 남겨 두자는 취지에서 양 쪽 다 일단 원서는 넣자고 다시 새로운 합의(?)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새들이는 서류지원 마감 날 학교를 쉬면서 입학지원서를 써야 했다.

11월 9일 서울시청 앞 노동자대회에 참석했던 새들이. 죽어간 노동자들을 보고 많이 놀라워 했다.
11월 9일 서울시청 앞 노동자대회에 참석했던 새들이. 죽어간 노동자들을 보고 많이 놀라워 했다.전희식

작은학교에서 요구하는 다섯 가지 항목에 대해 썼는데, 그 '입학지원서'를 읽고 새들이 엄마나 나는 숨이 멎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단숨에 쫘악 써내려 간 새들이의 입학지원서는 대안학교 보내는데 따르는 경제적 부담과 두 집 살림하는데 따른 불편함을 감수하는 쪽으로 부모 마음을 움직였다.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기의 마음을 담아냈는데 글 전체에 실상사 작은학교에 대한 애정과 진학하고 싶어하는 염원이 넘치는 글이었다. 저런 마음을 놔두고 어떻게 아빠의 권유에 따라 실상사 작은학교 진학을 포기했을까 싶은 게 마음이 짠해 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컴퓨터 게임을 안겠다는 결심이나 어디건 집착하지 않고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힘은 전적으로 보따리학교 영향이었다. 아이들의 강한 '또래문화 흉내내기'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가치를 또래들과의 문화 체험에서 발견하고 자기 생활을 나름대로 혁파(!)한 것이라고 나는 평가하게 되었다.

재미있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조용한 기회에 게임을 안 하기로 한 결심과 그 후로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는지 새들이에게 물었다. 새들이 말에 의하면 보따리학교나 길동무에서 누구도 컴퓨터게임 하지 말자는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어린 나이지만 새들이가 그들과 어울리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실상사에서 '길동무'가 진행한 보따리학교. 지리산 생명평화 선포식이 있었고 보따리학교 아이들이 축가를 불렀다.
실상사에서 '길동무'가 진행한 보따리학교. 지리산 생명평화 선포식이 있었고 보따리학교 아이들이 축가를 불렀다.전희식

새들이 말을 통해 내가 추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정준이형'이라는 소년의 영향이다. 정준이는 작년 우리쌀 지키기 100일 걷기와 올 여름의 새만금 살리기 3보1배를 한 부안 사는 아이다. 고1 때 중퇴하고 우리쌀 지키기를 시작했다. 소설가가 되려고 하는 정준군은 홈스쿨 중이다.

새들이가 정준이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감동적인 나눔이 있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새들이는 스스로 생각했던 문제점을 '정준이형'과의 만남을 통해 과감한 결단으로 전환시킨 것이 분명하다.

예비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빨래나 설거지도 해야 할지 모르니 세탁기 돌리는 법을 가르쳐 달라, 손빨래는 비누를 얼마나 칠 하냐, 밥 지을 때 전기밥솥 하고 압력밥솥에 물을 각각 어느 정도씩 넣어야 하느냐 등등 귀찮을 정도로 캐물었고 밥을 태우기도 했다. 나는 덕분에 불합격 위협을 미끼로 설거지를 새들이에게 떠넘기기도 했고, 같이 자고 나서 이불 개는 것도 새들이가 전담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제 길을 제가 찾아가는 새들이를 본다. 이런 자식을 보는 마음이 뿌듯하지만은 않다. 알 수 없는 아쉬움과 섭섭함이 함께 느껴진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부모'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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