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45

등록 2004.02.17 09:03수정 2004.02.1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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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 열흘째였다. 그날 군사들은 해뜨기 전부터 걸었다. 날씨가 워낙 추워서 차라리 걸으면서 몸을 푸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애초 카스피아 바다 바람을 피하느라 내륙 안쪽 길을 잡았던 것인데 이곳은 바람이 아닌 추위가, 그것도 닿으면 살갗이 톡톡 터져버릴 것 같은 매서운 추위가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어서 어젯밤에도 군사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군사들의 걸음걸이도 시원치 않았다. 벙거지에 솜옷까지 입었건만 발가락이 곱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이었다. 동상에 주의하라고 그토록 주의를 주었건만 벌써 발가락이 짓무른 군사가 여럿 속출했다.

이곳 추위는 확실히 중원이나 황하 지방과는 달랐다. 그곳은 아무리 추워도 바늘처럼 온 몸에 꽂혀들지는 않았다. 한데 이곳은 한번 추위가 꽂혀들면 불앞에 가기 전에는 빠지려들지 않았다. 지독했다. 어쩌면 산악과 사막이 겹쳐져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점심때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을을 지나 한참 가다보니 저만치 언덕바지가 보였다.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라 싶어 강 장수는 행군을 중지시키고 불을 피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제후를 찾았다. 군사들이 몸을 녹이는 사이 그에게 식량을 구해오라고 이르기 위해서였다.

제후는 저만치 아장들의 화톳불 옆에서 낙타와 함께 앉아 있었다. 강 장수는 그의 옆으로 다가앉으며 말했다.
"아까 지나쳐오면서 본 마을 있지요? 제법 크다던 그 마을 말입니다."
"예, 그런데요?"
"거기 가면 양이나 염소를 살 수 있겠지요?"
"그럴 수야 있겠습니다만…."

제후의 목소리는 달갑지가 않았다. 또 자기에게 시킬 게 뻔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처음 자기에게 그런 임무가 주어졌을 때는 마땅히 자기가 할일이라 싶어 기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번번이 그런 일을 시키니 이제 그만 짜증부터 치미는 것이었다. 그것도 장터라면 그나마 흥정하기도 수월할 테지만 이젠 마을로 들어가라니 제후 체면에 이게 뭔가 싶기도 했다.


"선인들과 함께 빈 마차를 끌고 가서 양 백 마리만 사오시지요."
강 장수가 공손히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울뚝 성질이 치밀어 '그러게 왜 군사들에게 점심까지 먹였느냔 말이오. 당장 전투를 치르는 것도 아닌데, 걷기만 하는데 그런 포시라운 대접이 가당하단 말이오?'하고 쏟아붓고 싶었다.

그는 치미는 성질을 꾹 누르고 몸을 일으켰다. 벌써 아장들이 빈 마차와 그가 탈 말까지 끌고 온 때문이었다.

제후가 양과 염소를 사서 빈 마차에 실고 돌아와 보니 군사들은 각자 짝을 지어 무릎치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어린애들 대 부대가 흩어져서 천방지축으로 놀이를 하고 꼴이었다. 가관이었다. 점심까지 먹여가며 기운 빼는 일이 고작 저런 일이었다. 제후의 심술에는 또다시 회가 돌았다.


"아이구, 오늘도 실한 놈들을 사오셨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강 장수가 양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후가 물어보았다.
"그런데 지금 군사들이 하는 짓들이 뭣입니까?"
"다리에 긴장을 푸는 데는 무릎치기가 좋지 않습니까, 허허."

강 장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선인들에게 염소 열 마리를 구우라고 지시했다. 운동 후 한 두 점씩이라도 먹고 나면 더운 기운이 다리로 뻗어갈 것이고, 그때 다시 행군을 시작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데 염소 고기를 막 나누어 먹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서 나귀를 탄 무리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무리들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손에 뭔가를 들고 기를 쓰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뭐요?"
에인이 물었다.
"아이그, 아까 양을 사온 그 마을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제후가 대답했다.

"그들이 왜 저렇게 달려오는 것이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때 맨 앞에 나귀를 탄 사람들이 창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후는 즉각 알아차렸다. 누가 여기에 몰려 있는 군사들 무리를 보고 자기들을 침략하러 온 것으로 여겼고, 아까 짐승들을 산 것은 마을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들어갔던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제후는 그러나 오히려 잘된 일이라 싶었다. 이참에 군사들을 한번 써먹을 수도 있고, 또 그 실력들도 파악해보는 기회도 될 것이었다.

"강 장수, 분명히 우리를 치려고 오는 것 같은데, 어떻게 대처하면 좋습니까?"
이번엔 에인이 강 장수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일단 물러나야 합니다."
"물러나다니요?"
"어서 철수명령부터 내리십시오. 저들이 도착하기 전에 달아나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병법이오?"
"가면서 말씀드릴 테니 어서 후퇴명령을 내리십시오."

싸울 마음도, 싸워보지도 않은 적들에게 후퇴명령? 에인은 그것이 좀 이상했지만 일단은 강 장수의 생각을 따르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에인은 급히 천리마에 오르며 큰 소리로 퇴각명령을 내렸다.

"전원 퇴각하라! 서둘러라! 짐승과 마차부터 앞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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