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52

등록 2004.03.03 15:44수정 2004.03.0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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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문은 아슈르 가까이에 있었다. 이 지역은 니시루의 험준한 산맥이 가로놓였고 티그리스 강을 건너면 또 아시리아 고원이었다. 그러니까 딜문은 그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들의 영토 앞에도 비손 강이 흐르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의 연변을 제외하면 모두가 평탄한 사막지대에다 곳곳에 높이 100미터 정도의 구릉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 구릉 위에 고대 도시국가들이 차례로 등락한 것은 그로부터 1백년 쯤 뒤, 대홍수 이후였다.

대홍수 이전이던 이후이던 그 주변에 웅거한 종족들은 대체로 농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 아래쪽은 벌써 갖가지의 채소와 밀을 생산했고, 목축업 만큼이나 농업에도 주력하는 것에 비하면 사뭇 대조적이었다. 그러니까 딜문은 그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농사를 짓던 마을이었던 셈이다.

때문에 사막 안으로 들어갈수록 농사를 모르는 유목민의 군거지가 많았고 그중에서도 가장 세력을 떨쳤던 집단이 바로 '곡식을 모르는 종족'으로 불리는 그 부족이었다. 이 집단은 시리아, 아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있던 각각의 종족들이 한데 뭉치면서 세력을 키운 것으로, 사실은 다종 집단이었다.

그들은 물과 양젖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것은 약탈로 해결했고 약탈에만 만족하지 않고 딜문까지 점령함으로서 그 세력은 극도로 팽창해 주변의 중소부족 혹은 수장국들도 은근히 불안에 떨고 있었다.

동이 터왔다. 멀리 토성이 보였다. 제후는 급히 말을 저지시켰다.

"저기가 딜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에인도 강 장수도 뒤따라 내렸다. 강 장수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일성을 토했다.


"여기에도 토성이 있군요!"

크게 높진 않았지만 흙으로 쌓아올린 그것은 환족의 도성에는 어디든지 볼 수 있는 형태였다. 제후가 장수의 말에는 대답도 않고 급하게 다그치기부터 했다.


"여기서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다 와서 그만 돌아가다니요?"

"어디에서나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그들이 말을 탄 우리들을 본다면 반드시 탈취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말을 탈취해요?"

"그들이 가진 말은 거의 당나귀입니다. 이처럼 크고 늘씬한 말은 그들에게도 귀물이라 기어코 뺏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다고 우리가 빼앗깁니까?"

강 장수가 얼른 되받았다. 그러나 제후는 고개까지 흔들며 말했다.

"그들은 그런 종족입니다. 욕심나는 것은 우선 뺏고 보자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십시다. 정탐을 하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제후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에인은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럼 강 장수와 제후께서는 여기서 돌아가십시오. 나 혼자라도 돌아보고 뒤를 따라가겠습니다."

"더욱이 혼자서요?"

"그들이 말을 좋아한다면 말 두 마리는 더 위험할 수도 있지요. 오던 길로 되돌아가시면 저도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오늘 밤이나 내일 다시 오면 안 될까요?"

제후의 눈에는 공포까지 어려 들었다. 자기가 당했던 변란이 새삼 진저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에인의 마음이 흔들렸다.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과 제후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출렁출렁 서로 우열을 다투었다. 그는 말을 쳐다보았다.

'그래, 결정권은 천둥이에게 있다.'

그는 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피곤한 기색이면 제후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천둥이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순한 눈이 자기는 괜찮아요, 하는 것 같았고 피곤은커녕 초롱초롱 빛나기까지 했다. 그는 당장 말 등에 휙 올랐다. 그러고 나서 일행들께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외곽으로 해서 한바퀴 핑 돌아보고 가겠습니다."

그는 천둥이 등을 철썩 갈겼다.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주인 혼자만 태워서 그런지 동작까지도 아주 날래졌다.

에인은 행여라도 말발굽소리가 들릴까 해서 멀찍이서 토성을 돌았다. 토성 안의 건물들이 하나 둘,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날이 밝아왔던 것이다. 토성은 영토 전체를 둘러싼 것은 아니었다. 한참 가자 토성은 끊어졌고 그 안쪽으로는 방치된 들녘이 보였다.

에인은 발길을 멈추고 들을 살펴보았다. 오래 묵혀둔 논이었다. 환족들이 볍씨를 가져와 그렇게 농사를 지었으나 경작을 모르는 이 종족들이 마을만 차지하고 농토는 그대로 버려둔 것이었다.

'여기다 보리를 심어도 좋겠는데…. 그래, 내년 봄에는 이 땅에서 파씨도 뿌릴 수 있을 것이다.'

에인은 파령에서 가져온 파씨를 떠올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마을 쪽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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