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오래된 책을 보내 주세요"

극작가와 고서점 경영인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 <채링크로스 84번지>

등록 2004.03.09 16:16수정 2004.03.1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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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 <채링크로스 84번지>

책 <채링크로스 84번지> ⓒ 궁리

언제부터인가 <오마이뉴스>에 올라오는 최종규 기자의 '헌책방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헌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이 책 <채링크로스 84번지>는 미국의 극작가인 헬렌 한프가 영국의 고서점인 채링크로스 84번지 마크스 서점과 주고받은 편지의 모음집이다. 헬렌 한프는 어느 날 발견한 이 고서점의 주소로 구입하길 희망하는 책들의 목록을 보내게 된다.


친절한 서점의 직원들은 그 책들을 하나하나 찾아 보내면서 그녀와 서간을 주고받는데, 그 편지의 내용이 일반적인 주문서와 청구서를 떠나 문학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토요문학 평론지에 실린 귀하의 광고를 보니 절판 서적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하셨더군요. 저는 '희귀 고서점'이라는 말만 봐도 기가 질리곤 하는데, '희귀' 하면 곧 값이 비쌀 것이라는 생각부터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입니다.

여기서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아주 고가의 희귀본이나 아니면 이것저것 끄적여 놓은 반스앤드노블스의 학생판으로밖에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목록 중 깨끗하면서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 책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구매 주문으로 여기고 발송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시작된 구매 주문 편지는 이 헌책방이 문을 닫을 때까지 20년이란 긴 세월을 넘으며 이어진다. 이 책은 안소니 홉킨스와 앤 밴크로프트 주연의 <84번가의 비밀문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많은 이들이 알게 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편지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도서 주문서와 대금 청구서라는 상업적 문서의 틀을 뛰어 넘어 20여년 간 책에 대한 애정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하기 힘든 책을 구하는 사람의 절실함과 그 절실함을 이해하는 서점상의 따뜻한 마음의 교감은 이들의 편지를 읽는 내내 웃음을 머금게 한다.


애써 보내준 책에 대해 '세상에 무슨 이런 사악한 신약성서가 다 있어요?' 라고 불평하는 구입자 헬렌 한프. 그 물음에 친절하게 다른 성서를 찾아보겠다고 답하는 서점상 프랭크는 성실한 태도로 그녀의 온갖 불만과 요구에 응답한다.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이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의 영국은 전쟁 중이라 많은 이들이 굉장히 곤란한 지경이었는데, 이 재치있는 서적 구매자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달걀과 햄 세트를 서점 직원들에게 보내는 등 따뜻한 마음을 베푼다.

그리고 그녀의 이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한 서점 직원들은 그녀가 요구하는 서적들을 정성껏 보내 주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보답한다. 물론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작은 편지도 함께 말이다.

"친애하는 한프 양, 저는 마크스 서점에서 2년 가까이 도서 목록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소포를 보내 주실 때마다 번번이 한몫을 나눠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고 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 빌 험프리스 드림"

"친애하는 한프 양, 소포에 대한 인사가 없어 혹시 뭐가 잘못된 건 아닌지 염려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를 감사도 모르는 패거리로 생각 하셨겠지요. 사실은 제가 그동안 안쓰럽게 바닥난 재고를 채우기 위해 교양 있는 가정을 찾아 전국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중략)

어떤 식으로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오늘 서적 우편으로 작은 책을 한 권 부쳤습니다. 부디 한프 양 마음에 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얼마 전에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애 시집을 한 권 찾아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글쎄요, 저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습니다. - 마크스 서점 프랭크 도엘 드림"


이 가슴 따뜻한 편지들을 읽으면서 웃음을 머금지 않을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은 단순히 '책'이라는 대상물 자체만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은 아니다. 책에 나오는 아름다운 문체를 사랑하고 그 책을 다루는 이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책을 쓴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가득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책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서간집이 가치 있는 것은 책과 책을 둘러싼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그들의 글을 통해 스미듯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20여년 간이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의 글은 세월을 지난 지금에까지 많은 의미를 전한다.

이 오래된 편지 교환은 마크스 서점의 오랜 지킴이 프랭크 도엘이 사망하면서 끝나게 된다. 그의 죽음에 대한 헬렌의 애도는 그녀의 영국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 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기억에 남는 서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허름한 책방, 혹은 그 집의 나이든 주인, 먼지 쌓인 책들,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마음. 이런 자그마한 '책사랑'이 서로의 마음을 엮는 끈이 되어 이 서간집의 헬렌과 프랭크처럼 책을 통한 교감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궁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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