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마음으로 봄을 알리는 '보춘화(報春花)'

내게로 다가온 꽃들(37)

등록 2004.03.31 10:17수정 2004.03.3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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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춘화-춘란
보춘화-춘란이선희
보춘화(報春花)는 '봄을 알리는 꽃'이라 하여 춘란(春蘭)이라고도 합니다. 난은 사계절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잎 선이 그리는 넉넉한 자태와 맑고 청아한 향기를 갖기에 선인들에게서 사군자 중의 하나로 분류되었습니다.

꽃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꼭 보고 싶지만 야생의 상태에서 볼 수 없는 꽃이 있습니다. 발품을 덜 팔아서 그렇기도 하고, 아직은 보여줄 때가 아니라고 꼭꼭 숨어있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꽃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들이 말하듯 '임자가 따로 있는' 꽃들도 있습니다. 같은 길을 걸어가도 누군 보고, 누군 보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마음 아픈 것은 흔하디 흔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뽑혀져 우리에게서 멀어진 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소개해 드리는 보춘화입니다.

불과 삼 년 전만 해도 저희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디에 보춘화가 지천에 깔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그 곳을 서너 번 찾아갔어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가만히 두면 지천에 피어있을 꽃들을 괴롭히고, 잠시 소유하다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김민수
보춘화의 꽃말은 '소박한 마음'입니다. 보춘화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티가 나고 준수한 데다가 국수발같이 실한 뿌리는 어디에 내어놓아도 그 생명력이 끈질길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외향적으로는 귀공자 같으면서도 그 내면에는 소박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서민들 같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보춘화는 관상적인 가치 이외에 약으로 쓰기도 한답니다. 꽃을 차로 다려 마시기도 하고 뿌리나 잎을 약으로 쓰기도 하는데 몸의 기운을 다스리고 피를 잘 돌게 하며 눈을 밝게 하는 등 여러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군자(四君子)는 매화(梅)·난초(蘭)·국화(菊)·대나무(竹)의 총칭이며, 이 4가지가 초목이나 꽃 중에서도 기품 있고 고결한 군자와 같다 해서 붙여진 호칭입니다. 매·난·국·죽의 순서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순서에 맞추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고고한 품격과 향을 품고 있는 매화, 사시사철 푸른 잎을 간직하고 있다가 꽃을 피워 깊고 그윽한 높은 인격의 향을 풍기는 아름다운 난초, 늦가을 서리 속에 피어 더없이 아름다운 향을 뽐내며 늦가을 정취를 더해주는 지조 높은 국화, 추운 겨울에도 그 푸름과 꼿꼿함을 잃지 않는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인 것이죠.

김민수
난(蘭)에 관한 시하면 고교시절 외우고 또 외웠던 가람 이병기 님의 '난초'라는 시조가 떠오릅니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제주오일장에 갔더니 꽃집마다 보춘화가 지천이었습니다. 꽃대까지 올라온 춘란 서너 촉이 불과 이천원이니 야생의 상태에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 싶어 서너촉을 사왔습니다. 화분 두 군데 나눠 심어 하나는 지인에게 선물을 하고 하나는 춘란의 자생상태와 비슷한 곳에 두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두었는데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며 바람이 심하게 불어 연약한 꽃대가 다 부러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거실로 들여왔는데 이게 실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이파리며 꽃이며 전부 축 늘어졌습니다. 춘란을 위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를 해하는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밖에 내어놓으니 사흘이 못되어 다시 꼿꼿하게 이파리를 세웁니다. 참 고맙습니다.

김민수
그런데 난 한 촉에 몇 천 만원을 호가하는 것이 있고 이것도 모자라 한 촉에 1억원에 달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대략 작은 난 화분에 서너촉이 한 작품을 이루니 족히 화분 하나에 몇 억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무식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식의 독점이나 이런 식의 꽃 사랑은 소유하고 독점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춘란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소박합니다.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봄을 알려줍니다. 풍족함으로 자신의 생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 가운데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더하고, 삶을 강인하게 살아갑니다. 이런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 그 사람들이 그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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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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