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한 밀 농사, 푸르름이 넘친다

밀,보리 등 월동 작물에서 삶의 이치가 보인다

등록 2004.04.03 01:45수정 2004.04.03 11:3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밀이 자라고 있다. 왕겨를 덮어 준 곳이다.
밀이 자라고 있다. 왕겨를 덮어 준 곳이다.전희식
요즘 들판에 독야청청 밀과 보리를 보았는가? 우리 밭에 자라는 밀과 보리가 동네에서 명물이 되어간다. 동네 논밭 어디에도 지금 우리 밭처럼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곳이 없다. 몇몇 군데 마늘밭이나 푸른색을 어렴풋이 띄고 있을 뿐 아직은 이른 녹색 물결이 밀 보리밭에는 가득하다. 어젯밤에 비가 오더니 오늘 아침에 보는 밀밭은 또 색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올해는 밀밭이건 보리밭이건 잡풀도 별로 없다. 4년 전인가. 처음 밀농사 했을 때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올해는 나름대로 궁리를 해가며 신경 써서 하니 자라기도 잘 자라고 잡풀도 없는 것이 아무래도 풍년을 이루지 않을까 예감이 좋다. 물론 타작을 해 봐야 안다. 농사라는 게 워낙 농사꾼의 정성도 정성이지만 날씨라는 큰 변수가 있으니까 그렇다. 타작해서 집안으로 끌어다 놓을 때까지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봐야한다.

작년 가을에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에서 일하는 후배에게 밀 20kg을 가져다가 반 되는 뒷집 할머니가 된장 만드는 데 밀을 싹 틔워 넣고 싶다고 해서 퍼 주었고 반 되는 밥 할 때 한 줌씩 넣어 먹으려고 따로 떠놓고 나머지를 다 파종했는데 며칠 전에 겨우내 모아 둔 오줌을 조금씩 뿌려 주었더니 쑥쑥 자라고 있다.

작년 가을. 콩 밭에 보리를 직파해서 막 싹이 나고 있는 모습이다.
작년 가을. 콩 밭에 보리를 직파해서 막 싹이 나고 있는 모습이다.전희식
밀하고 보리가 한 300여 평 될까? 아랫밭은 보리를 심고 윗밭은 밀을 심었다. 다 직파를 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일부 밀은 땅을 살짝 갈아 묻었는데 자라는 것이 다 다를 뿐 아니라 발아율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이렇게 한 이유는 까치가 덤비는 것이 걱정되어서였다.

이번에도 산까치 피해가 클 줄 알고 일부는 밭을 갈아 흙으로 묻은 것이고 또 직파를 하더라도 조금 배게 뿌렸는데 까치들의 입맛이 달라졌는지 고생하는 나 보기가 딱했는지 올해는 입도 대지 않아 속아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처음 밀농사 할 때는 이놈들이 몇 날 굶었는지 고함을 치면서 쫓아도 밭과 감나무 가지에 폴짝 날아가 앉았다가 내가 돌아서면 다시 덤벼들었다. 직파한 위로 제법 많이 깻대를 썰어 덮었는데도 닭들처럼 까치들이 발부리로 파헤쳐가며 밀알을 주워 먹는 데는 내가 두 손 다 들 지경이었다.

올 해 밀밭에 잡풀이 없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직파를 한 곳은 모두 작년 가을에 콩 타작, 들깨 타작을 하고서 대궁을 일일이 작두로 잘게 썰어 덮어 주었기 때문이다. 농사 부산물이 씨앗을 덮어 발아를 촉진하고 조류피해도 줄이고 지금처럼 잡풀도 안 나게 해 주는 것이다.
혼자서 작두질을 몇 날 며칠 하면서 오른손 손바닥에 물집이 몇 번이나 잡혔다 터졌다 반복했다.

땅을 갈아 심은 곳은 정미소에서 왕겨를 사다가 두껍게 뿌려 주었다. 밀싹은 왕겨를 뚫고 솟아났지만 잡풀들은 새 봄에도 싹을 틔우지 못한다. 시쳇말로 햇볕도 못보고 씨가 말라버린다. 마늘이나 밀, 생강, 보리 등은 워낙 힘이 좋은 작물이라 씨를 뿌리고 잔뜩 덮어줘도 잘 뚫고 올라온다. 월동작물이 다 그렇지만 밀이나 보리는 한 겨울을 지내면서 음 기운이 강해서 여름 음식으로 제격이다. 더위를 타지 않게 하는 음식들이다.


처음 밀농사를 했다가 그 후로 밀농사는 아예 꿈도 꾸지 않게 되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제 웃음이 난다.

직파한 밀 위로 깻대와 콩대를 잘라 덮어 준 곳이다. 풀매기를 전혀 안해도 될 성 싶다.
직파한 밀 위로 깻대와 콩대를 잘라 덮어 준 곳이다. 풀매기를 전혀 안해도 될 성 싶다.전희식
까치 떼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밀을 파먹어대서 전쟁을 치러야 했고 이듬해 봄에는 호미로 풀을 매느라 허리가 상했다. 그보다도 추수할 때 밀농사는 정이 똑 떨어져 버렸다. 밀을 베어 깔아 놓았는데 내가 타작을 하려고 하면 웬 비가 그리 쏟아지던지. 처마 밑으로, 남의 축사 안으로 밀 다발을 지게에 지고 나르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햇볕이 나면 밖에 널었고 마를만 하면 비가 다시 쏟아졌다.


밀대는 거무스름하게 썩어가고 밀 이삭에서 싹이 나기 시작했다. 도리깨로 타작을 다 하고 마루에 쌓아 놓은 밀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우리밀운동본부에 싣고 가서 전부 우리밀 라면으로 바꾸어 먹었다.

콤바인을 부를 만큼 밀농사를 크게 짓는 것도 아니고 맨손으로 하기에는 버거운 노릇이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확실하게 밀걷이를 끝내야 한다.

작년 가을에 일일이 들깨대를 작두로 썰었다. 멀리 새날이가 일을 거드는 모습이 보인다.
작년 가을에 일일이 들깨대를 작두로 썰었다. 멀리 새날이가 일을 거드는 모습이 보인다.전희식
밭 한 켠 40여 평에 자라고 있는 보리는 아주 귀한 종자다. 토종 종자를 저 멀리 전남 승주에서 자연농을 하시는 한원식 선생 댁에서 가져 온 것이다. 콩밭에 콩을 베기 전에 뿌려서 콩잎이 떨어지면서 보리씨를 덮게 만들었다. 직파를 했는데 발아율이 땅을 갈고 묻은 것만큼은 안 되도 고르게 잘 났다.

다음 주에 우리 집에서 총선을 특집으로 하는 길동무(refarm.or.kr)의 <보따리학교>가 열리면 밥에 넣어먹다 남은 우리밀을 뻥튀기 해서 줄까 싶다. 아직도 한 보따리 남아있는 옥수수를 까넣고 뻥튀기 해도 좋을 것이다.

밀과 보리밭에 조금씩 나 있는 잡풀들도 그때까지 보따리학교 아이들의 몫으로 남겨 두려고 한다. <보따리학교>의 아이들이 겨울을 뚫고 의연히 자라는 밀밭에서 역경을 잘 헤쳐나가는 삶의 지혜를 깨우치고 힘을 키워 낸다면 그보다 더한 추수가 어디 있으랴 싶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