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과 속(俗)의 변증법적 만남, 으름

내게로 다가온 꽃들(39)

등록 2004.04.07 07:12수정 2004.04.0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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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름덩굴의 꽃망울-3월 31일
으름덩굴의 꽃망울-3월 31일김민수

꽃에 눈길을 주며 유년의 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보낸 시간이 어느새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작년 이맘때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지만 고사리를 캐러 들에 나갔다가 진한 향기에 이끌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가 발견한 꽃이 으름 덩굴이었습니다.

암꽃과 수꽃이 어우러져 나무나 다른 돌담에 의지하며 하늘로 향하는 모양새와 은은한 보랏빛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향기, 암꽃의 술이 마치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의 형상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사순절을 보내면서 많은 신앙적인 사색들을 이끌어내었던 그 꽃을 올해 또다시 만났습니다.

김민수

연한 이파리들 사이에 작은 콩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늘에 매달린 듯한 형상으로 땅을 향해 피어 있는 꽃 몽우리들과 끊임없이 하늘을 향하려는 덩굴의 모습 속에서 성(聖)과 속(俗)의 조화를 봅니다. 그렇게 어름은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겸손과 하늘을 향하는 이상을 동시에 보여 준 예쁜 꽃이었습니다.


한 줄기에서도 꽃 모양이 달라서 궁금했는데 식물도감을 찾아보니 암꽃(큰 것)과 수꽃(작은 것)이 함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열매가 익는데 일명 '한국산 바나나'라고 합니다.

김민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골에서 자란 많은 분들이 으름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지고 있었더군요. 서울 촌놈인 저만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가을엔 꼭 먹어 보고 말거야"하는 말에 아내는 불혹의 나이를 넘긴 사람이 꼭 어린 아이 같다고 타박을 했습니다.

제주의 꽃에 취해서 그렇게 봄을 보내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되어 꽃을 보았던 그 자리에 가보았습니다. 하지만 태풍 매미로 열매가 다 떨어졌는지 아니면 열매가 맺힐 때가 안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으름 열매의 흔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으름열매-9월초
으름열매-9월초김민수

이후에 누군가 으름 열매가 열렸다고 말을 했지만 바쁜 일상 때문에 찾아 나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귀포시에 나가는 길에 중산간도로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는 곁길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어?"


드디어 으름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아직은 다 익지 않아 벌어지지 않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열매라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반가운 마음에 하나 따서 덥석 깨물었습니다. 순간 까실까실한 맛이 입안에 퍼지는가 싶더니 목구멍까지 까실까실한 맛이 전해지면서 목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근처에 물이 없어 애써 침을 만들어 삼키며 성판악휴게소에서 물을 먹기까지 고생을 좀 했습니다.

저절로 익어서 벌어진 다음에나 먹을 수 있는 것인데 덜 익은 것도 그런 대로 맛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죠.


김민수

그리고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때에 먹음직스럽게 하얀 속살을 내보인 으름 열매를 다시 만났습니다. 하지만 열매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서 할머니들이 으름을 따러 다니시는 것으로 보아 손에 닿을 만한 것은 이미 다 없어졌을 것 같았습니다. 가까스로 새가 먹다 남은 것으로 보이는 으름을 하나 얻었습니다. 까만 씨들이 무척이나 많았지만 그 달짝지근한 맛은 정말 영락없는 바나나맛이었습니다. 사실 그보다는 훨씬 달았습니다.

저는 그렇다 치고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맛보이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시장에라도 나가서 살 수 있으면 사다 주어야겠다 생각했지만 그러면서 가을은 점점 깊어갔습니다.

김민수

이제 으름 열매의 철이 지나갔겠거니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가을꽃을 찍으러 산에 들어갔다가 계곡 가까운 곳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으름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보이지 않을 때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더니 이렇게 하나가 보이기 시작하니까 금세 여기저기에서 잘 익은 으름 열매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들 손으로 딸 만한 높이에 있더군요.

씨가 많아서 불편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새들이 많이 찾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요긴한 식량이니 식구 수대로 두개씩 먹을 정도만 땄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신기한 열매를 맛보일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씨가 많아서 먹기 불편했는지 아이들은 애지중지 가져온 것을 달랑 하나만 먹더니 눈길도 안 주더군요. '잘 됐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별로 먹지 않는 틈을 타 아이들 몫까지 신나게 먹었습니다. 씨앗만 없다면 아이들에게도 정말 인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씨 없는 수박도 있는데 누군가가 씨 없는 으름도 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으름 열매는 숲의 새들에게 아주 좋은 먹을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새들의 것을 빼앗아 먹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해 보았던 으름 꽃이 올해도 어김없이 피었습니다. 올 가을에는 아내와 제 것만 너댓개 따야겠습니다.

큰꽃은 암꽃, 작은꽃은 숫꽃입니다.
큰꽃은 암꽃, 작은꽃은 숫꽃입니다.김민수

어린 시절 들판은 무궁무진한 먹을거리를 얻는 소중한 공간이었습니다. 겨우내 언 땅이 풀리기 시작하면 삽과 톱을 챙겨서 칡을 캐러 다녔고, 보리수며 도토리와 밤은 물론이고 버섯, 개암 등등 숲에만 들어가면 천연의 군것질거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현대식 매장의 진열장에 흠 하나 없이 잘 포장된 때깔이 좋은 것에만 익숙해 있는 우리 아이들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겠지요. 우리 아이들에게 숲이나 들판으로 한 걸음 다가가 피어 있는 꽃들과 나무들도 보여주고, 그들이 주는 소중함을 느끼게 하고 맛보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민수

덩굴식물들의 공통점은 줄기가 가늘고 약해서 혼자서는 곧게 서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의지해서 설 수밖에 없습니다. 덩굴줄기나 덩굴손으로 감고 올라가기도 하고, 공기 뿌리나 빨판으로 바위나 나무에 붙기도 하고, 으름처럼 다른 것에 기대에 서기도 합니다.

자연에서 홀로 서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홀로 서지 못하면 기대어 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간혹 기대어 살아가던 것들이 기둥이 되어주고 의지할 곳이 되어준 이들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김민수

홀로 서지 못하니 어쩌면 땅으로만 기면서 자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홀로 서지 못하면서도 하늘을 향하고, 사람들의 손이 닿지 못할 만큼 높은 곳에 열매를 내어 놓는 한국산 바나나 으름을 보면서 작은 희망을 봅니다.

홀로 서지 못하면서도 하늘을 향해 자랄 수 있음을 감사하고 땅을 바라보면서 피는 겸손한 꽃, 그러면서도 이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하늘을 향하는 꽃이니 성(聖)과 속(俗)의 변증법적인 만남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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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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