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고통을 체감하다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고

등록 2004.05.24 09:17수정 2004.05.2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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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신비' 체감


a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포스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포스터

지난 5일 저녁 천안에서 가족과 함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그리스도의 수난)>를 보았다. 어머니는 함께 하시지 않았지만 우리 가족이 오랜만에 함께 본 영화였다.

오래 전부터 그 영화를 보고 싶어했던 딸아이는 올해 들어서는 처음으로 '문화생활'을 한다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끔찍한 수난 장면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우리는 영화관에 들어가 앉아서는 지레 무거운 압박감 같은 것을 지녀야 했다.

압박감의 지속 속에서 영화를 보았다. 잔인하고도 끔찍한 장면들을 목도해야 하는 고통을 간간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고통 속에서 아내는 신음을 삼키고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도 충격과 전율을 감내하는 표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12시간의 긴박함과 처절한 수난 고통들이 그대로 우리에게로 압축되어 전이되는 것을 아프게 경험한 시간이었다.

그 영화를 나 혼자 본 것이 아니었다. 우리 네 가족이 함께 한 시간이었다. 당연히 영화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딸아이의 원룸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리고 원룸에 도착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옛날에(내 아이들의 지금 나이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먼저 본 영화의 제목은 잊었지만, 후에 본 것은 <왕 중 왕>이라는 영화였다. 일부 장면들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다.


옛날에 본 두 편의 영화보다도 이번에 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훨씬 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상황의 '완벽한 재현'이라는 평가를 그대로 실감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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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유대'가 아니라 '인간 예수'다

천주교에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기도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총독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을 시작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해골산)에 올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다음 돌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그 십자가 길의 열 네 가지 사건을 기억하며 바치는 기도이다.


경배와 장궤(무릎 꿇음)를 반복하는 30분쯤 소요되는 비교적 어려운 기도이다. 이 기도를 옛날에는 '성로신공(聖路神功)'이라고 했고 또는 '14처 기도'라고도 했는데, 주로 사순절 기간에 바친다.

신자들이 개별로 또는 공동으로 수시로 바치는 '묵주기도'라는 것도 있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인데, 보편적으로 네 가지의 지향을 가지고 기도한다. 그 지향은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빛의 신비로 분류되며, 묵주가 십자가와 54개의 알 즉 5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관련하여 지향마다 다섯 가지씩의 '묵상' 자료를 지닌다.

네 가지의 지향 중에서 '고통의 신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를 위하여 피땀을 흘리심, 매를 맞으심, 가시관을 쓰심, 십자가를 지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 등 다섯 가지의 묵상 자료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수난 사건들을 차례로 하나씩 기억하면서 고통의 신비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고 나서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비교적 착실하게 신앙 생활을 해왔으니 해마다 사순절을 맞아 공적인 십자가의 길 기도에 참여한 것만도 내 세월의 길이 만큼 많을 터였다. 또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거의 매일같이 묵주기도를 하고 사니, 고통의 신비 지향으로 바친 묵주기도도 헤아릴 수 없을 많을 터였다.

그렇게 십자가의 길 기도와 고통의 신비 지향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한 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혹독한 수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서 절절히 마음 아파한 적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저 피상적으로만 묵상을 하면서, 또 관성적으로 묵상을 표방하면서 기도를 해왔을 뿐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참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는 좀 더 달라진 마음으로 기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뇌리에 많은 구체적인 영상들이 마련되었으니 앞으로는 예수님의 그 참혹한 수난 장면들을 떠올리고 마음 아파하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a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한 장면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한 장면


마지막 순간의 갈림길

예수 그리스도의 그 끔찍한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 속에는 참으로 많은 세상사가 함축되어 있다. 그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깊은 의미들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의미들은 결국 나에게 두 갈래의 길을 제시하며 그 기로에서의 확실한 선택을 요구한다.

우리는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되고 그 마지막 순간에는 어떤 형태로든 예수 그리스도의 양옆에서 함께 죽어 가는 두 죄수와 똑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은 이 세상의 두 갈래 길을 극명하게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그 상황 속에서도 상반(相反)의 절정을 모습을 보여 주는 두 사람의 태도는 그대로 내 마지막 순간의 그 갈림길의 표징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세상의 존재 자체에서 신을 느끼고 세상의 온갖 이치들을 신의 배려로 체험하며 사는 사람이지만, 나에게도 여러 가지 가변성이 늘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영하다가 하루아침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이 될 수도 있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는 베드로가 될 수도 있고, 스승을 팔아먹는 유다가 될 수도 있다.

예수에게 잔혹하게 매질을 하며 쾌감을 느끼는 로마 병사가 될 수도 있고, 말과 행위로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상황을 빚을 수도 있다. 내 말들이 상황에 따라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능멸하고 조롱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내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지점은 예수 그리스도 옆에서 함께 죽는 죄수들의 처지다. 그 죽는 순간에 어떤 태도를 지닐 것인가는 더없이 중요한 명제다.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하며 자신을 의탁하는 죄수의 태도가 내 목표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준비 또한 나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영화를 보며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지막지하게 매질을 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로마 병사들 속에 내재한 인간의 잔인한 근성이었다.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 살려냈다는 불가해한 사람을 자신들이 맘껏 매질한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더욱 큰 신명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온 이스라엘 땅에서 단기간에 가장 유명해진 사람을 자신들이 맘껏 매질할 수 있는 현실 조건과 제도의 위력을 확인하는 기쁨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을 그토록 모욕하며 매질을 하는데도 당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변함없는 현상을 확인하는 쾌감 같은 것도 그들을 더욱 고무하고 자극했을 것이다.

그런 숨막힐 듯한 상황과 참혹한 장면을 지켜보면서 나는 예수님의 그 수난은 이미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순교사(殉敎史)'를 예고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몸소 그런 일을 겪고 그런 길을 가셨기에 그리스도교가 2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세계 각지에서 무수히 많은 순교자들을 내었고, 순교자들이 한결같이 그 고통의 길을 용감히 따라갈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도 있었던 지역감정의 기류도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었다. 로마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말하면서 '갈릴리 사람'이라고 지방의 명칭을 자꾸 사용하는 것에서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예수를 못 박으면서 예수의 머리 위에 '유대아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굳이 지명을 명시한 명패를 붙인 것에서도….

이스라엘에서 갈릴리 지방은 로마의 지배에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던 곳이었다. 그 갈릴리 지방에서 나자렛은 중심적인 고장이었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방법의 하나로 지역감정을 조장했다. 거기에 바리새인들이 앞서서 동조했다. 그리하여 갈릴리 지방은 어느덧 이스라엘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곳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자렛 예수'라는 명패 속에는 멸시받고 천대받는 지역 출신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었다.

a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한 장면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한 장면


예수께서 보여 주신 효도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지칭함에 있어 꼭 '성모'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신심이 극진하고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다. 그것이 매우 당연하다는 사실을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수천 년 전부터 탄생이 예고된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러나 구세주의 탄생 예고에는 어머니 마리아의 존재도 함께 한다. 인류에게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려는 창조주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 마리아는 애초부터 '약속의 여인'으로 점지되어 예수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의 탄생만을 위해 단지 '몸을 빌려주었을 뿐'인 여인이 아니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에게 살과 피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서 예수의 몸과 영이 결합되게 했다. 예수를 낳고 길렀을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길과 죽음의 현장에서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슬픔과 고통을 함께 했다.

루가 복음서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장면을 자세히 보여 준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고 인사한다. 그리고 당황하는 마리아에게 구체적으로 수태를 고지한다.

"은총을 받았다"라는 말은 성령을 받았다는 뜻이다. "가득히"라는 말은 모자람도 결함도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마리아가 성령으로 가득 채워졌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태어날 몸이기에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주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야말로 '지고지순'과 '거룩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은총(성령)을 가득히 받고, 주(성부)께서 함께 계시고, 그리하여 마침내 하느님의 아들(성자)을 잉태하여 낳았으니, 마리아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다 들어있었던 셈이다. 한 몸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다 들어 계셨던 여인, 그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다.

성모 마리아는 아드님 예수로 하여금 첫 번째 기적을 앞당겨 행하게 했던 분이다. 유명한 가나안 혼인잔칫집에서의 물을 술로 변하게 한 사건이다. 술이 떨어져 곤란을 겪는 상황을 보신 어머니가 아드님에게 그 사정을 말한다. 어머니의 속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처음에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로 완곡히 거절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재차 그 딱한 사정을 말하니, 아드님 예수는 어머니의 거듭된 '청'을 거절치 못하고 아직 때가 아닌 그 기적을 앞당겨 행하신다.

성경 근본주의자들의 말대로 성경에는 "마리아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어디에도 없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런 명시적인 구절은 없다.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그대로 마리아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고 '성모'라는 호칭도 생략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한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마리아를 공경하지 말라"는 말씀 또한 없다. 그 대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의 한 장면에서 보게 되듯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말씀은 분명히 존재한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마리아를 일러 "네 어머니다"라고 하셨다.

그로써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한 마리아를 내 어머니로 모시고 공경해야 할 의무를 안게 되었다.

나는 지난해 팔순을 넘기신 노모를 모시고 산다. 어머니께서 자식들 간에 또 이웃들 간에 여러 가지 중계를 많이 하신다. 썩 내키지 않는 일도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따르게 되는 일도 적지 않다.

지난달에 소설가 황원갑 선배가 태안을 다녀갔다. 그도 팔순이 넘으신 노모를 모시고 사는 처지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 집에 들러 노친께 인사드리기를 원했다. 때마침 내 노친께서 출타 중이어서 그러지 못하자 굳이 정육점을 찾아가서 쇠고기 두 근을 끊어 내 손에 쥐어주며 노친께 끓여드리라고 했다.

여간 고맙지 않았다. 그분 역시 노친을 모시고 살기에 그런 일이 좀더 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덕분에 내 노친은 얼굴도 보지 못한 황원갑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기억한다. 내가 그와 통화를 하고 나서 아무개라고 말해 드리면 반색을 하신다.

예수님도 마찬가지 마음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 성모 마리아님을 공경하고 기쁘게 해드리면 예수님도 한결 흐뭇한 마음이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뿐이라는 구실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무시하면 예수님 마음이 별로 좋으실 것 같지 않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인지상정을 지니신 분이셨으니까….

a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한 장면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한 장면


그는 ‘모든 이의 모든 것’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장면도 보여 준다.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시는 장면이다. 또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며 하신 말씀도 들려준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으로 세우신 ‘성체성사’가 가톨릭 교회 미사의 핵심적인 신비로 존재하고 있는 사실에서 나는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새롭게 새겨들을 수 있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그리스도교의 명확한 존재 이유 중의 하나지만, 그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의 상반된 신앙 태도(믿음과 가르침)를 가지게 한다.

한 가지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믿음과 가르침이다. 다른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가르침이다. 이것은 연옥 교리의 유무(有無)와 직결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 모든 이의 구세주로 생각한다. 예수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를 모르고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극악무도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사후세계의 하나인 연옥(영혼을 정화하는 곳)에서 구원을 기다린다고 한다.

그리고 지상의 교회와 사람들이 연옥 영혼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덕에 힘입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세상 떠난 모든 영혼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열심히 기도한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믿는 사람들만의 구세주’로 만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서 산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태도이기도 하다. 예수를 믿지 않은 모든 사람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며 착하게 산 사람들까지도 모조리 지옥에 갔을 거라는 치부이기도 하니, 생각하며 참으로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또 그 같은 생각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의 내용보다 믿음 자체만을 중요시하는 기형적인 경향도 생겨나게 되고,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난폭한 구호도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가족과 함께 본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내 신앙 상태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고 점검하게 하는 귀중한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고통의 신비’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때 예수님과 또 성모 마리아님과 좀더 밀착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화에서 수시로 본 사탄의 형상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언제나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탄의 형상은 내게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사탄은 내 주변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늘 존재하며 배회한다는 사실에서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모든 올바르지 못한 행위와 상황들을 하느님보다도 사탄이 더 세밀히 지켜보고 기억해 둘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늘 사탄을 의식하면서 사탄의 눈초리에 더 많이 포착되고 또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될 일을 적극적으로 피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열심히 살다보면 하느님의 보호의 눈길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내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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