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전 동학군의 유골을 보다

농민혁명군 '전경로 의사' 면례식을 보고

등록 2004.07.30 20:35수정 2004.08.0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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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동학농민혁명군 전경로 의사 면례식 광경

동학농민혁명군 전경로 의사 면례식 광경

지난 23일 오전 충남 태안 땅의 한 곳 원북면 마산리에서는 매우 특별한 일이 하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군 전경로 의사(全慶魯 義士) 면례식(緬禮式)'이라는 이름의 행사였다. 좀더 쉽게 말하면 110년 전에 만들어진 묘(墓) 안에서 당시 동학군이었던 전경로님의 유골을 꺼내어 이장을 하는 일이었다.


원북면 마산리 산 127번지 '둥글봉'에 자리하고 있던 묘를 파헤치고 유골을 꺼내어 이장하는 일은 집안 행사였다. 근처 부인의 묘에 합장을 한다고 했다. 집안 후손들의 어떤 필요에 의해서 하게 된 그 일이 널리 알려지고, 나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곳에 가서 그 행사를 지켜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묘의 임자는 110년 전에 '보국안민(輔國安民)·제폭구민(除暴救民)·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 아래 분연히 일어서서 폭압정권의 관군·일본군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동학군이었다.

그 묘 안에 잠들어 있는 조상이 동학군이었음을 알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후손들이 이장 작업을 계획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동학혁명태안군기념사업회>에 알려와 결국은 나도 110년 전 동학군 한 분의 유골을 '면례(緬禮)'하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군 전경로 의사의 묘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여러 가지 말이 있었다고 한다. 홍주(홍성) 전투지에서 찾지 못한 유해 대신 말안장을 가져와 묻었다는 말, 유해와 말안장이 함께 묻혔다는 말 등이었다.

a 유골 발굴 작업 착수

유골 발굴 작업 착수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은 전경로 의사의 묘 안에서 말안장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갖는 눈치였다. 말안장이 별것은 아니지만, 갑오동학혁명 당시의 전투 유품이 발굴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확실한 전투 유품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북접(北接) 동학군 중에도 말을 타고 전투를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될 터이니, 만일 말안장이 발굴된다면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일일 터였다.


하지만 묘 안에서 말안장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 대신 유골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뚜렷하고 반듯하게 누워 있는 유골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탄성을 머금었다.

전경로님은 43세로 삶을 마쳤다고 했다. 나는 그의 나이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43세라면 이미 청년기를 지난 나이였다. 혈기도 의분도 힘차게 솟고라지는 시기는 아니었다. 또 처자식들을 거느리고 있는 몸이었다. 그런 그가 동학에 투신하고 기포군의 대열에 참여하여 태안읍으로 진격한 후 홍주까지 나아가 전투를 했다니, 그 투혼의 정신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무릎에 총상을 입고 절명했다고 전해진다. 무릎에 총상을 입었다면 전투지에서 이내 절명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어디인가로 피신하여 한동안 숨어 지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제대로 치료도 하지 못하면서 총상을 입어 썩어 가는 무릎의 통증을 감내하면서, 참담하고도 격심한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결국 낭설이 되었지만, 그 묘에 유해 대신 말안장이 묻혔으리라는 말은 그의 명확하지 않은 기일(忌日)과도 관련이 있을 듯싶다. 110년 전 동학군에 가담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에는 '동짓달 보름'이 기일인 이들이 많다. 죽은 날이 확실치 않은 사람들은 모두 동짓달 보름을 기일로 삼은 까닭이다. 전경로님 역시 동짓달 보름을 기일로 삼고 후손들이 지금까지 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동짓달 보름은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북접 기포군이 태안 관아를 접수한 10월 1일, 해미 승전곡에서 전투를 벌인 24일, 예산에서 격전을 치른 26일, 홍성에서 대격전 끝에 패퇴를 한 28일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죽은 날이 확실치 않은 사람들의 기일을 동짓달 보름으로 삼은 것은, 동짓달이 그 참혹했던 10월의 바로 다음달이고, 보름은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날인 데다가 여러 가지 상징을 지니는 날이기 때문일 터이다.

아무튼 전경로님의 기일이 동짓달 보름인 것은, 다시 말해 그의 기일이 명확치 않은 것은 그 죽음이 집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추정케 한다. 당시 동학군은 '역적'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이었다. 관군과 일본군의 동학군 토벌과 감시는 혹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총상을 입고 돌아온 그는 집에서도 숨어 지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집이 아닌 비밀 장소에 숨어서 무릎 총상의 고통을 감내하다가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 절명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전경로 의사의 면례식 행사장에서 만난 원북면 반계리의 전옥성(59)씨는 자신의 증조부가 동학군이었다는 증거가 없어 아쉬웠는데, 그 증조부의 기일이 전경로님과 같은 동짓달 보름이라는 사실에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a 110년의 시간을 가르고 무덤 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전경로 의사의 유골

110년의 시간을 가르고 무덤 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전경로 의사의 유골

110년 전에 참된 세상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분연히 일어서서 갑오동학농민군에 가담했던 전경로 의사는 2004년 7월 23일 유골의 모습으로 오늘의 후손들과 상면했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고 싶었고, 그것을 성호로 대신했다.

그는 비록 43세를 일기로 엄혹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삶을 마쳤지만, 참 세상을 향한 그 투혼의 정신과 의로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오늘날에는 '국가유공자'의 칭호를 받게 되고 후손들의 삶 속에서 길이길이 함께 살게 되었으니, 그는 오늘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얻은 것이 아닐까? (지난 2월 '동학농민혁명 참가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전경로님은 '국가유공자'와 '의사(義士)'라는 공적인 칭호를 동시에 받게 되었다.)

나는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동학농민혁명군의 유골을 처음으로 보면서 숙연한 마음 속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짧은 한평생 비루하게 살지 않고, 늘 의로움을 추구하며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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