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자통신연구원오마이뉴스 심규상
국내 최대 정보통신 국책연구원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지난달 29일 감사원 특별감사 결과, 정보통신산업 발전에 투입돼야할 국민세금이 정통부와 연구원, 일부 업체사이의 ‘뇌물 잔치’에 쓰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충격에 휩싸인 곳이다.
이번 특감결과 각종 비리에 전현직 연구원 18명이 포함됐고, 이 가운데 전임 원장을 비롯한 9명은 비리혐의 내용이 무거워 검찰에 고발돼 일부는 구속되기도 했다.
검찰은 이들을 상대로 정보화촉진기금이 지원되는 국책연구사업에 참여해주는 대가로 해당 납품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부분 등 ETRI 전반에 걸친 수사를 진행시킬 조짐까지 보이자 연구원은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하지만 관련업계 종사자들은 ETRI의 드러난 비리에 대해 ‘이미 예견됐던 일’이라며 ‘올 것이 왔을 뿐’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내부 개혁을 꾸준히 요구해왔던 ETRI 노동조합 정기현(45) 위원장도 2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는 그동안 비리혐의자 감싸기에만 급급하고 내부개혁을 소홀히 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단언했다.
"DJ정부 시절 벤처장려 정책으로 해당업체 주식취득 아무런 문제 없어“
정 위원장은 ETRI연구원들과 관련벤처기업들의 유착관계를 외부와 내부 요인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는 외부적 요인으로 “DJ정부 시절 경제회복을 목적으로 벤처창업을 적극 장려하면서 ETRI 연구원의 60~70%가 ETRI를 떠나 벤처창업에 참여했다”며 “당시에는 연구원들의 벤처기업의 주식취득도 투자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장려되던 분위기였다”고 운을 뗐다.
정 위원장은 이어“문제는 당시 정부가 1만개 벤처기업 육성 정책을 추진하면서 해당벤처기업들의 주식취득에 대한 어떠한 가이드라인이나 주의사항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정 위원장은 ETRI 내부의 감사시스템 부재, 전임 원장 및 고위경영진의 도덕적 해이, 비리혐의자에 대한 미온적 대처 등 ETRI 내부 자정노력 및 개혁 마인드 부족도 연구원들과 업체간 유착 비리연루에 한몫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지난 시절에는 전임원장이 직접 비리에 연루됐고 감사실과 원장과의 갈등으로 감사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연구원 비리에 대한 예방노력이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며 “(비리문제에 대한) 노조의 문제제기도 묵살됐으니 공적인 견제 기능은 완전히 붕괴된 셈”이라고 전했다.
“공적인 견제 기능 붕괴로 비리예방활동 전무
정 위원장은 특히 “신임원장이 부임한 이후 올 4월 ETRI 자체 감사에서 업체로부터 골프채를 상납받은 연구원에게 3개월 정직처분을 내리고도 바로 책임연구원으로 승진시켰다”며 “비리혐의자에 대한 이러한 미온적인 대처와 면죄부 때문에 직원들의 불신과 불만이 높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 해결방안으로 인적청산을 비롯한 강력한 내부 개혁을 그는 주문했다. "전임원장이 비리혐의 등으로 ETRI 역사상 최초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하차했으면 신임원장은 내부의 곪아터진 부분을 도려내는 강력한 개혁에 나서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 위원장의 주문이다.
다음은 정기현 ETRI 노조위원장과의 일문일답이다.
"DJ정부시절 ETRI 연구원 60~70% 벤처창업“
- 전직 간부에 이어 현직 연구원도 검찰에 구속됐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무엇으로 보나.
"복합적인 것이다. 연구원과 관련 벤처기업들의 관계는 긴 맥락을 봐야한다. 지난 99년부터 2001년까지는 당시 DJ정부가 경기회복 정책의 하나로 벤처창업을 적극 장려하던 시절이다. 또 벤처창업의 주요 대상이 ETRI에 재직하고 있던 연구원이었다. 그때 ETRI 연구원들의 60~70%가 퇴직해서 벤처기업을 차릴 정도로 벤처기업 바람이 불었다. 정부가 ETRI 연구원들의 등을 떠밀다시피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시절이었다.
또 벤처기업을 차리고 자본금을 마련하기 위해 투자자를 모집했는데 벤처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 또한 정부 차원에서 장려되는 분위기였다. 이에따라 벤처기업들은 남아있는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투자자 모집을 활발하게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ETRI 연구원들도 벤처기업의 주식을 샀다. 함께 일했던 연구원들이 차린 회사들의 주식을 주로 산 것이다. 당시에는 이러한 부분들이 지금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장려되는 분위기였다."
- 정부의 벤처장려 정책이 연구원들과 벤처기업간 유착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인가.
"문제는 당시 벤처 1만개 만들기 등의 정책 추진과정에서 연구원들의 벤처기업 주식취득 제한 등의 가이드라인이라든가 주의사항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연구원들이 벤처기업에 투자해 주식을 취득하는 것을 장려하고 허용했다. 지금이야 ETRI 연구원들이 관련 벤처기업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지만 당시의 도덕적 기준과 분위기는 달랐다."
- 그런데 현재 검찰 수사대상에 오른 것은 직무와 관련해 주식 등 금품을 받은 연구원들에 대한 것 아닌가.
"물론 과도하게 업무와 관련돼서 이해관계가 얽힌 기업과 공생관계까지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초창기 정부 정책상 벤처기업에 투자했던 많은 연구원들은 위험이 높은 벤처기업의 특성상 손해를 본 경우도 많았다. 직접 현금을 받거나 주식을 상납받은 것과 같은 명백한 비리와 연구원들이 소액 투자를 한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