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한여름의 연탄가스

나무 땔감 밖에 모르던 내가 도시문명을 접하게 된 계기가 연탄이었다

등록 2004.08.11 19:22수정 2004.08.12 10:2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연탄 두개를 집게로 찍어 밖에 내다 버리던 때가 언제였던가요?
이 연탄 두개를 집게로 찍어 밖에 내다 버리던 때가 언제였던가요?김규환
내가 살던 고향 전남 화순은 강원도 삼척, 정선과 함께 무연탄이 꽤 많이 나는 곳이었다. 집으로 가던 길 동면 구암리에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가 있다. 화순의 1/3은 탄가루가 풀풀 날렸다. 주변은 검둥이 산이었다.


같은 화순군이지만 우리 마을에서 운주사를 가려면 83km나 떨어져 있으니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작년에야 갔다 왔다. 화순 촌놈이 화순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으니 고향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내놓을 만한 게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다. 그래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제사 밝힌다.

탄광에서 불과 30여km 더 가면 내 고향 북면이다. 북면 백아산 자락은 화순군 세 권역 가운데 가장 동북쪽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은 해발 400여 미터가 넘는 고지를 넘어야 한다. 한번 그곳에 들어가면 빠져 나오기도 힘들다.

그러니 단기사병들은 비나 눈이 오는 대낮에나 밤엔 만고땡(?)이다. 근무를 팽개치고 늘어지게 잠을 자는가 하면 면대에서 삼겹살에 소주파티를 즐기고 고스톱 판을 펼친다. 대대와 여단에선 아예 손을 놓고 있었으니 담양이나 곡성 쪽으로 사단사령부에서 불시에 한번 점검을 나오면 몇 명은 사단으로 불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그곳의 빨치산들은 안전지대에 지냈으니 오죽이나 좋았을까. 가장 오랫동안 3500여 병력이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북면 자체가 거대한 요새였다. 지척에 남쪽으론 무등산(1084m)이 동남으론 모후산(918m)에 둘러싸고 있다. 조계산 추월산도 멀지 않다. 백아산 마당바위에 오르면 그곳은 요새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아깝도록 산 정상에 위대한 바위 성(城)이 있으니 군경합동작전을 감행해도 웬만해선 무너지지 않았다.

고향마을에는 연탄 아궁이가 아닌 재래식이 끝까지 버텼다.
고향마을에는 연탄 아궁이가 아닌 재래식이 끝까지 버텼다.김규환
백아산 주변 마을 중 송단-양지와 노치리 두 골짜기 예닐곱 마을은 전남 정중앙부에 위치했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아가고 있었다. 단지 먹을 게 부족할 뿐 나무나 베어 땔감을 가득 쌓아두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단적인 예로 겨울 뿐만 아니라 여름철에도 농한기엔 나무 베는 것이 일이었다. 추위가 워낙 심한 까닭에 추위라도 모면하려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하여간 그곳엔 중소도시나 일반 농촌에서 70년대 후반에 어렵잖게 볼 수 있었던 연탄 한 장 구경하기 힘들었다. 구공탄이 뭔지도 몰랐고 구멍이 12개짜리가 있는지도 몰랐다. 심하게 말하면 아무리 잘 사는 집이라 하더라도 부엌에서 연탄을 때거나 연탄아궁이로 고친 사례가 여직 없었다.


대개 땔나무-연탄아궁이-연탄보일러-석유보일러-가스보일러-지역난방으로 이어지는 난방시스템의 변천에서 제외된 지역이었다. 연탄을 이용한 두 단계를 생략하고 80년대 중후반까지 나무 땔감을 쓰다가 곧바로 석유보일러로 뛰어 넘은 것이다.

그 거무튀튀한 연탄 옮길 일도, 불 꺼트리지 않고 연탄불 봐야할 일도 없었다. 군불을 넉넉하게 때놓고 아침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던 그 시절의 고향에선 연탄재를 길가나 남새밭에 갖다 버릴 일도 없어 좋았다. 뿐인가 숨이 탁 막히는 연탄가스를 맡을 일 없었으니 내 뇌는 산소로 가득해 영특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평화롭게 세상살이가 죽 이어지는 줄 알았다. 심지어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도 난로에 갈탄을 때보지 못했으니 우린 학교로 장작을 한 움큼씩 싸매 들고 등교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곤 했다.

그 때 오토바이는 미끄럽다며 차를 잡아준 파출소 직원과 연탄차 내외분께 감사드립니다.
그 때 오토바이는 미끄럽다며 차를 잡아준 파출소 직원과 연탄차 내외분께 감사드립니다.김규환
그러나 세상은 변하게 되어 있다. 아니 그 빠른 속도를 허겁지겁 따르기에도 무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본격적으로 연탄과 애처로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첫 인연은 학력고사 성적에 따라 각자 갈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고 2차로 논술고사를 보던 날 일어났다. 시험당일에 고양시 화전동에서 출발하여 수색-응암동-녹번동-홍제동-서대문-서울역을 거쳐 서울시경-청계천-용두동-안암동로터리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타는 동안 펄펄 날리는 눈발에 차가 거북이 걸음을 한다.

시간에 쫓겨 안절부절 차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통에 안암 동부 파출소에서 잡아준 시커먼 연탄 차가 학교 안까지 태워다주어 45분이나 늦었는데도 간신히 시험을 치를 수 있었던 웃지 못할 사건이다.

다음은 소위 닭장 집에 얽힌 일화다. 8월 중순에도 형제들 네 명과 두 형수님 그리고 직원 두 명이 함께 운영하던 공장 기름때가 싫어 2학기 준비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일찌감치 밥이라도 얻어먹고 천원을 받아 들고서 학교에 갈 참이었다.

중학생인 여동생도 등교를 서둘렀다.

“야야~일어나~”
“응~”
“얼른 일어나라니까. 학교 늦겠다.”
“알았어.”
“니가 먼저 씻어야 내가 세수를 하지….”

프레스와 자동기계가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새벽부터 돌아가는 공장에서 기거하던 큰형 내외에게 느지막이 밥 달라고 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뻔하기 때문에 8시까지 시간을 맞춰 안집에서 나와야 한다.

“글면 나 먼저 머리 깜을게.”

잠시 뒤였다. 가방을 챙기는 동안 머리를 감던 동생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물이 엎질러지고 쨍그랑 소리가 들린다.

“왜?”
“몰라 그냥 어지러워.”

간신히 수습을 하고 방으로 들어온 동생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면서도 다시 스르르 넘어진다.

“야! 왜 그래?”
“몰러.”
“가만 있어봐. 오빠가 잡아줄테니 같이 나가자.”

가방을 들고 밖에 나가 있는 동생은 다닥다닥 붙은 닭장집 문을 잠그는 동안 입구로 나가더니 두세 걸음을 못가 뒤뚱뒤뚱 술 취한 듯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옷은 온통 먼지를 뒤집어썼다.

“야, 잠깐 기다리라니까.”
“오빠, 나도 기다릴라고 했어.”
“알았다. 그러면 잠시 방에 가 있자. 가서 누워 있어.”

부축하여 방으로 끌고 들어가 이불을 덮어주고 문을 꼭 닫고 600여 미터 앞쪽에 있는 형네들에게로 갔다. 아는 사람이 몇 분 있었지만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면서 비몽사몽 걸어갔으니 상대방이 걸어오는 말에도 응답을 할 수 없었다. 3~4분이면 갈 수 있었던 거리를 10분쯤이나 허비해서 도착했을까.

이것도 함부로 차지 말라던 어떤 시인이 있었죠. "연탄 함부로 팔아 먹지 맙시다."
이것도 함부로 차지 말라던 어떤 시인이 있었죠. "연탄 함부로 팔아 먹지 맙시다."김규환
“형수님, 저…저…연순이한테 얼른 가보세요.”
“왜요, 도련님?”
“몰라요, 이상해요.”

8월 중순은 아직 밤에도 더웠다. 그러던 어느 날 시누이와 시동생이 어질어질하다고 하니 곧바로 감이 오질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마치 승복이 형처럼 정황을 말하고 공장 방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형수님이 달려갔다. 우리가 자던 현관문을 열자 진한 가스 냄새가 확 밀려오더란다. 그건 연탄가스였다. 감히 8월에 연탄가스라니! 분명 우린 늦봄까지만 연탄을 땠는데 무슨 변고인가. 게다가 주변 사람들도 더워서 창문으로도 모자라 현관문을 열어젖힌 때인데 말이다.

형수님은 어린 시누이가 누워 있는 방문을 모두 열었다. 자초지종을 알아봤더니 바로 옆집에 마침 전날 이사 온 사람들이 눅눅함을 없애려고 방에 불을 넣었단다. 그런데 그도 모자라 다닥다닥 붙은 옆집, 우리 방바닥을 타고 연탄가스가 침입한 것이라고 한다.

동생을 공장 집까지 업고 와 뉘이고 밥 대신 동치미 국물을 내온다. 국물을 한 그릇씩 비우고 마려운 오줌을 꾹 참고 오전 내내 누워 있었다. 꾀병이랄까 봐 자리를 털고 공장 집을 빠져나왔지만 그날 여동생은 학교에 결석까지 했다.

벌써 17년 전의 일인데도 아찔한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 뒤로 난 연탄 가까이 가지 않는다.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나서는 연탄구이집도 한동안 찾지 않았다. 지금은 손 하나만 까딱하면 더위와 추위를 물려주니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누구에게나 그 시절은 있었다.

지금까지 연탄도 없어 난방을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삶이 평준화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까지 연탄도 없어 난방을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삶이 평준화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김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 "우리 오빠" 후폭풍...이준석 추가 폭로, 국힘은 선택적 침묵 김건희 "우리 오빠" 후폭풍...이준석 추가 폭로, 국힘은 선택적 침묵
  2. 2 박근혜 탄핵 때와 유사...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 박근혜 탄핵 때와 유사...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
  3. 3 사진에 담긴 진실... 이대로 두면 대한민국 끝난다 사진에 담긴 진실... 이대로 두면 대한민국 끝난다
  4. 4 신체·속옷 찍어 '성관계 후기', 위험한 픽업아티스트 상담소 신체·속옷 찍어 '성관계 후기', 위험한 픽업아티스트 상담소
  5. 5 전 대법관, 박정훈 대령 바라보며 "왜 '별들'은..." 전 대법관, 박정훈 대령 바라보며 "왜 '별들'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