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금요일' 허리케인이 덮치다

[현장 르포] 허리케인 찰리, 미 남부 플로리다 올랜도 강타

등록 2004.08.16 16:38수정 2004.08.16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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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올랜도 북부 롱우드 지역의 한 집에 나무가 지붕을 덮친 광경.

올랜도 북부 롱우드 지역의 한 집에 나무가 지붕을 덮친 광경. ⓒ 김명곤

과연 자연의 힘은 엄청났다. 지난 이틀간 기자는 평생 처음으로 플로리다 허리케인의 맛을 톡톡히 보았다. 10여년 넘게 플로리다에 살면서 이번만큼 오금을 저리게 한 허리케인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지난 13일 밤 10시경(아래 미국 현지시간) 허리케인이 이곳 플로리다 올랜도 지역을 통과한 지 42시간만에야 기자가 일하고 있는 동포 신문사 사무실에 전기가 들어왔다.

기자가 살고 있는 집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식사 때마다 햄버거집을 전전하거나 가스 버너로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지내고 있다. 그나마 물이 끊기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지역 초·중·고등학교는 16일과 17일에도 문을 열지 않기로 했다.

이번에 경험한 허리케인을 시간대 별로 적어본다.

a 허리케인이 닥치기 세 시간 전인 13일 오후 6시 올랜도의 434번 도로. 열대성 토네이도가 지나고 있다.

허리케인이 닥치기 세 시간 전인 13일 오후 6시 올랜도의 434번 도로. 열대성 토네이도가 지나고 있다. ⓒ 김명곤


[13일 정오~오후 6시] 갑자기 진로 바꾼 찰리

허리케인이 오던 날은 미국인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주 교육청은 이날 초·중·고등학교의 문을 닫도록 했으며, 은행과 우체국은 물론 관공서와 대부분의 상점들도 정오 무렵부터 문을 닫기 시작했다. 마이애미와 탬파 등을 포함한 플로리다 남부와 중서부 도시들의 공항도 전면 폐쇄했다.

그러나 허리케인 통과지역에서 제외된 중앙플로리다지역 올랜도시의 국제공항은 폐쇄하지 않았다. 낮 12시경 외지에서 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는데 길거리에는 이미 퇴근하는 차량들로 체증이 일어나고 있었다. 평소 40분이면 가는 거리를 1시간 반이나 걸려 공항에 도착했는데, 탑승객들은 평소의 3분의 1 가량으로 줄어 있었다.


공항을 떠나 되돌아 나온 지 20분 가량 되었는데도 웬일인지 공항에서 떠오르는 비행기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시커먼 먹구름이 탬파쪽에서 밀려와 공항쪽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게 보였다. 곧이어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 비바람이 몰아쳐 가던 차들이 길가에 멈춰섰다. 열대성 토네이도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허리케인이 탬파 아래쪽에서 우회전해서 올랜도쪽으로 갈 것이라는 긴급 예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당초 예보는 허리케인이 쿠바에서 플로리다 남서부 도시인 포트 마이어즈에 상륙해서 중서부 도시인 탬파를 거쳐 서부해안으로 타고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허리케인이 방향을 바꿔 밤 9시에서 10시쯤 올랜도를 지나갈 것이라는 예보는 올랜도 등 플로리다 중부지역 주민들을 무척 당황하게 했고 허둥대게 만들었다.

전날까지 "우리는 파티나 하자"면서 마음을 놓고 있던 올랜도 지역 주민들은 서둘러 창문에 판자를 붙이고 못질을 하는 등 부산한 모습이었다. 주유소에는 가스를 넣으려는 차량들이 길게 줄을 섰고, 월마트 등 일상용품점에는 양초와 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허둥댄 것은 올랜도 지역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하루 전부터 올랜도쪽으로 피난을 왔던 탬파지역 주민들은 허리케인이 올랜도쪽으로 치고 올라올 것이라는 소식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 심각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디즈니, 시월드, 유니버설 등 테마파크를 찾은 여행객들도 발을 동동 굴렀다. 정말 재수 옴 붙은 '13일의 금요일'이었던 것이다.

a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인 밤 10시반 I-4 고속도로. 평상시 엄청나게 붐볐을 거리에 차량이 보이지 않는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인 밤 10시반 I-4 고속도로. 평상시 엄청나게 붐볐을 거리에 차량이 보이지 않는다. ⓒ 김명곤


[13일 오후 6시~10시] 악몽 같은 13일의 금요일

기자도 오후 6시경 가족과 함께 저녁을 일찍 먹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단층집이긴 했으나 앞 뒤 뜰에 크고 작은 나무가 많아 걱정스러웠다.

1년 반 전에 이사 오면서 지붕을 덮었던 큰 도토리 나무 가지를 잘라낸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뜰에 두었던 화분들도 모조리 집 안으로 들였고, 정원 의자 등 강풍에 날릴 만한 것은 모두 뉘어 놓았다.

밤 8시 반쯤 되자 '휘이익, 위이잉~'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안방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TV를 켜 놓은 채 기상 위성 화면을 보니 둘둘 말린 '태풍의 눈'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정면에서 '손님'이 오는 것을 보기 위해 집밖 처마에 달린 5개의 정원용 등 스위치를 모두 올렸다.

9시가 막 지날 무렵, 드디어 어두운 밤거리에서 찰리는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창문을 치는가 했더니 나무를 마구 뒤흔들고 차고 문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지붕 위에 '우지끈 뚝딱!'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 가슴이 떨렸다. 소파에 앉아 태연한 척 기타를 치고 있던 고 2짜리 딸아이가 밖을 내다보더니 '오 마이 갓!'을 연발했다. 집 앞 거목이 넘어질 것 같다는 것이다.

집 뒤뜰을 살피다 앞쪽으로 달려가 보니 어른 팔뚝 두 개 두께의 가시나무가 지붕을 치기 시작하더니 휘청거리다 넘어지기 시작했다. "저 정도 쯤이야!"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뒤뜰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기에 달려갔다.

20피트 정도의 키에 어른 장딴지 두께의 백송 나무가 넘어지기 시작했다. 9시 40분쯤 드디어 머리끄덩이 잡아채듯 시달리던 백송이 뿌리를 드러낸 채 70도 정도로 기울며 휘둘렸다. 집 안쪽 유리창 쪽으로 넘어지지 않은 게 크게 다행이었다.

9시 50분쯤 되니 집 전체가 흔들렸다. 불이 깜박거리더니 그예 전기가 나가고 말았다. 촛불을 켜들고 불안하게 앞뒤쪽을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뿌지직 쿵!' 소리가 나는 듯했다. 언뜻 집 부근의 지정 피신처인 교회를 떠올렸다. 드디어 10시가 되었다. 바람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 같았다.

신기했다. 10시 5분쯤 되자 찰리는 꼬리를 내리고 물러가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현저히 잦아 들고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10시간 같은 1시간을 '태풍의 눈' 속에서 지내면서 확인하게 된 것은,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은 정말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 그 어떤 초강대국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것이었다. 자연의 힘에 경외심을 갖게 된 하룻밤이었다.

a 허리케인으로 부러진 나무를 치우고 있는 모습

허리케인으로 부러진 나무를 치우고 있는 모습 ⓒ 김명곤


[13일 오후 10시~11시반] 올랜도는 유령의 도시

찰리가 물러간 것을 재차 확인한 후 플래시를 들고 집 밖으로 나와 앞 뒤 뜰을 살폈다. 백송 한 그루, 집 앞과 옆의 10피트 길이의 침엽수 두 그루, 그리고 뒤뜰의 귤나무가 뒤틀려 찢어져 있었다.

플래시를 비춰 지붕을 살펴보았는데 다행히 피해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허리케인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우직끈 쿵' 소리가 들린 것은 옆집의 아름드리 도토리 나무가 넘어지면서 그 집 모서리를 친 소리였다. 옆집은 식구들 모두 나와 움푹 패인 지붕을 덮느라 경황이 없었다. 빗물이 계속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곧바로 카메라를 들고 차를 몰고 나갔다. 밖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가로등은 물론 신호등 불도 나가버렸다. 길거리는 처참했다. 동네 모서리를 지나는 데에도 벌써 나무가 도로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바퀴에 나뭇가지가 깔려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a 한 소녀가 허리케인으로 나무 위에서 떨어진 다람쥐 새끼를 손 위에 올려놓은 채 울상을 짓고 있다.

한 소녀가 허리케인으로 나무 위에서 떨어진 다람쥐 새끼를 손 위에 올려놓은 채 울상을 짓고 있다. ⓒ 김명곤

서부 탬파로부터 동부 데이토나 비치까지 플로리다 중앙을 가로지르는 I-4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가는 중에도 곳곳에 나무가 쓰러져 있어 요리조리 피하며 나아갔다. 전기는 나가고 담장은 무너지고 나무는 길을 가로막고… 완전히 '전쟁터'였다.

조심조심 로컬 도로를 빠져나가 I-4 고속도로를 탔는데 지나는 차량이 거의 없다. 온통 캄캄해서 제한속도 60마일 도로를 30마일 정도로 달렸다. 저쪽 멀리서 경찰 차량들이 번쩍거리며 달리는 게 보였다.

20마일 정도를 시내 쪽으로 달렸는데 온통 암흑천지였다. 방송국 수신탑과 은행 건물 몇 군데의 불빛만 남고 모든 불빛이 사라진 도시를 달리자니 기분이 으스스했다. 평상시 금요일 밤 10시 반이면, 주말을 이곳에서 즐기기 위해 전국에서 엄청난 차량이 몰려들던 휘황한 '디즈니'의 도시가 유령의 도시가 된 것이다.

14일~15일 잠정집계, 16명 사망에 약 150억달러 피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살펴본 올랜도시의 모습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길거리 입간판은 떨어져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나무가 쓰러지고 도로 곳곳이 막혀 있었다. 가장 흔히 보여진 것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있는 것이었고, 나무가 지붕을 내려친 경우 또한 자주 눈에 띄었다.

어느 골프장 옆 2층집은 나무가 쓰러져 한 쪽이 가라앉고 있었다. 경찰이 노란 끈을 집 둘레에 둘러 통행을 금지시켰다. 허리케인 뒤끝으로 계속 비가 내리는 데다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아 곳곳에서 사고가 나 사이렌 소리가 하루종일 들렸다.

a 허리케인으로 나무가 2층집을 덮쳐 2층 난간이 내려 앉고 있다.

허리케인으로 나무가 2층집을 덮쳐 2층 난간이 내려 앉고 있다. ⓒ 김명곤

이틀이 지나면서 피해 상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 15일 현재 16명이 사망하고 수백 채의 집과 상점들이 날아가는 등 재산 피해만 150억불에 이르는 것으로 잠정 집계가 나왔다. 실종자들도 다수에 이르는 것으로 예측되고 있으나 시간이 더 지나야 자세한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허리케인으로 15일 현재까지 200만명이 전기 없이 생활하고 있다. 1992년의 허리케인 '앤드류'가 마이애미 지역을 강타했을 때는 43명이 사망했고, 피해액이 260억달러로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이번 허리케인 '찰리'는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강도가 센 것이다.

허리케인 찰리는 강도가 두 번째로 센 4급(풍속 131마일에서 151마일까지)에 속한다. 가장 강도가 높은 156마일 이상의 5급 허리케인은 어지간한 작은 빌딩을 날려 버리는 강도의 허리케인이다.

이번에 맨 처음 허리케인을 맞은 플로리다 남서부의 포트 마이어즈와 푼타 고다라는 도시는 풍속 145마일의 허리케인을 맞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기상 전문가들은 순간 풍속은 180마일까지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지역을 완전히 복구하는 데는 2개월 정도가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a 한 주민이 지붕에 올라가 피해를 점검하고 있다

한 주민이 지붕에 올라가 피해를 점검하고 있다 ⓒ 김명곤

플로리다 전역의 4만여명에 이르는 한인 동포들 피해 사례는 15일 현재까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인 포트 마이어즈에 약 500여명의 한인 동포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인명피해는 없더라도 상당한 재산 피해를 당한 한인들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1만여명의 동포들이 거주하는 올랜도는 포트 마이어즈보다 약한 풍속 105마일짜리 허리케인을 맞은 게 그나마 다행이긴 했으나, 15일 현재까지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부 지역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숙식에 큰 곤란을 겪고 있다. 시내 모텔이나 호텔 방이 없어 일부 동포들은 50~60마일 떨어진 동부 데이토나와 코코 비치 쪽 모텔을 잡아 생활하고 있다.

a 간밤의 허리케인으로 30년생 도토리 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넘어져 있다.

간밤의 허리케인으로 30년생 도토리 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넘어져 있다. ⓒ 김명곤


부시, 플로리다 재난에 발빠른 행보

한편 플로리다에서 재난이 일어나자 부시 대통령은 즉각 플로리다를 재난지역으로 선포했고, 연방정부의 긴급 구호자금과 구호장비들을 투여하도록 관계기관에 명령했다. 부시는 14일에는 동생인 잽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와와 함께 직접 현장을 방문해 재난자들을 위로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처럼 발빠른 행보에 나선 것은 1992년 허리케인 앤드류가 발생했을 때 아버지 부시대통령이 늑장 대처해 여론의 비난을 샀고, 결국 재선에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장 최근 실시된 ARG와 퀴니팩 여론조사기관의 플로리다 여론조사에서 부시는 케리에 각각 7%와 6% 뒤져 있던 차였다. 미국에서는 재난이 닥치면 정치인들에게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데, 이번 허리케인이 자칫하면 부시에게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기 때문에 부시는 상당히 당황해 하는 눈치이다.

민주당의 케리 후보는 14일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은 피해지역 주민들의 복구 작업에 오히려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면서 직접 방문하지는 않겠다고 밝히고, 부시 행정부의 피해 복구 노력에 다각도로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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