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칼... 누가 '사과나무'를 심는가

[기자협회 40주년 특보] 넘쳐나는 비판...비판...

등록 2004.08.18 11:53수정 2004.08.1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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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사회가 다시 태어날 것인가. 한국 기자사회를 대표하는 '기자협회'의 최근 자기성찰 움직임이 주목받고 있다. 기자협회가 16일 발행한 창립 40주년 기념 특보에 기자로서 삶을 냉철하게 돌아본 중견기자 3인의 글이 실렸다. <오마이뉴스>는 현직 기자들의 솔직한 고민을 전하기 위해 세 편의 글 전문을 싣는다....편집자 주

기자협회 40주년 특보.
기자협회 40주년 특보.기자협회특보
# 조선반도를 처참하게 유린했던 7년 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1592년 임진년의 세월은 정초부터 흉흉했다. 소문이 떠돌았다. 길삼봉이 지리산 피아골에서 역모의 군사를 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길삼봉이 누구냐?라는 질문은 누가 길삼봉이냐?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질문의 구조가 바뀌자 길삼봉의 허깨비는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길삼봉으로 지목당한 선비 정여립과 최영경에 연루된 자들 천여 명이 형틀에 묶여 죽었다. 가족 친척이 죽었고 함께 술 마시고 음풍농월한 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자들과 그들을 두둔한 자들과 그들을 욕한 자를 욕한 자들이 모조리 끌려나와 베어지거나 으깨졌다. 시체를 묻어준 자들도 끌려와서 베어졌다.

중국 산수화를 들여다보던 임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옥에 갇힌 자들을 끌어내서 죽였다. 우의정 정철이 그 피의 국면을 주도했다. 임금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임으로써 권력의 작동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삼봉은 강력한 헛것이었다.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길삼봉은 임금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승정원, 비변사, 사간원, 사헌부에 우글거리는 조정 대신 전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길삼봉이 숨을 수 있는 깊은 숲이었을 것이다. <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 부분 발췌 >

"간첩이 군장성을 조사"

# “간첩출신이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둔갑해 군장성을 조사하는 세상이 됐다”는 통탄과 함께 한나라당 박근혜대표가 국가정체성의 붕괴위기를 문제제기 한 바 있었다. 이에 한나라당은 별안간 대통령의 국가관에 의문을 표하고 일련의 ‘국가 기본를 흔든 사태’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지난 7월말부터 8월초에 한국을 뒤흔든 이른바 ‘국가정체성 논쟁’이란 뼈대이다.


대다수 국민은 뉴스의 헤드라인엔 민감하지만 뉴스의 총체적인 맥락엔 둔감하다. “간첩이 군 장성을 조사했다”는 천인공로한 일이 벌어져선 안된다는 원칙에서 분노를 표시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의 진실인가. 여전히 21세기 한국 사회엔 참으로 희한한 낙인찍기 시스템이 작동한다.

이 논란의 주인공 김삼석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은 1993년 국가안전기획부가 이름붙인 ‘남매간첩단사건’의 당사자이다. 일본을 왕래하면서 ‘한통련’등 북한관련 관계자에게 공작금을 지원받았다는 혐의로 간첩죄로 4년간 복역했다. 하지만 1995년 당시 권영해 국가안전기획부장은 남매간첩단 사건에 개입한 프락치가 안기부의 공작원이었음을 국회정보위에 출석해 증언한다. 즉 안기부가 관제 프락치를 이용해 함정에 빠뜨려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인 것이다.


안기부 조사과정에서 김삼석씨는 구타 수면금지 성적 고문 등을 당하면서 강제 허위자백을 당하고 강제에 의한 진술서에 도장을 찍고 만다. 이런 조작적 증거에 의거 김씨는 대법원 선고대로 4년간 복역한 것이다. 하지만 1999년 그는 소정의 절차에 의해 복권된다. 즉 국가적 검증절차에 의해 간첩혐의라는 억울한 누명을 벗은 것이다. 김씨는 2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김삼석씨는 “간첩혐의로 복역한 인물이 의문사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신문 보도를 시발점으로 해 다시 간첩으로 매도된다. 국가기관 안기부 관제 공작원에 의한 함정수사로 간첩혐의를 받고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던 피해자가 국가기관 조사관이 되는 것이 과연 나라의 정체성이 붕괴하는 일이 되는가. 이 웃지도 못할 사태가 바로 우리 곁에서 벌어졌다. 김씨의 인권은 어디로 갔으며 그에 대한 명예훼손은 어디서 해갈될 수 있을까.

진실이 실종되면 ‘집단 사고 Group Think’에 매몰된 맹목적 낙인찍기가 횡행한다. 오도된 집단논리는 ‘정보 실패’를 낳는다. 자기 흑백논리에 맞추는 정보는 신빙성을 잃고 자의적으로 변질된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대사변이나 사태로 직결될 수 있음을 현시점 세계인들은 목도하고 있다.

우리 한번 솔직해보자. 한국 사회의 분석자이자 조망자인 저널리스트들이여, 기본으로 돌아가 보자. 김씨의 사례에서 언론의 기본기능인 검증기능과 분석력이 제대로 작동되었다면 이런 어이없는 파란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은 향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한국의 '자중지란' 이벤트

기자들이 지난 4월 14일 헌법재판소의 노무현 대통령 헌법소추안 선고판결을 열심히 취재하고 있는 전경.
기자들이 지난 4월 14일 헌법재판소의 노무현 대통령 헌법소추안 선고판결을 열심히 취재하고 있는 전경.오마이뉴스 권우성
# 정확한 사실 확인 과정 없이 먼저 인용보도하고 보자는 성급한 취재 편집관행은 한국 저널리즘의 질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자승자박 행태가 되고 있다.

특히 한국 신문 저널리즘은 언제부터인지 취재의 출발점이 되어야할 사건 단서를 취재의 목적으로 삼아서 그 즉시 보도하는 성급함을 보이고 있다. ‘그런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는 단서 하나로 보도경쟁을 벌인다. 찬찬히 심층취재해서 전모를 독자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미덕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독자에 대한 신문의 설득력과 영향력은 밑으로 떨어지고만 있는 것이다. 이는 다매체시대에 인쇄미디어의 생존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신문이 가진 분석력, 사건에 대한 심층 천착성, 현상에 대한 검증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하고 ‘저널리즘의 수호천사’로서 거듭나야만 인터넷시대에도 독자에게 사랑받는 정보미디어 및 뉴스 도구가 될 것이다.

이라크 무장세력에 희생된 고 김선일씨 피랍사건 보도도 ‘피랍된 동포의 생명 구하기’라는 본질에서 벗어난 경우다. 테러범들의 잔인함을 규탄하고 재발을 막는 방법론을 환기시키기 보다는 한국 외교부의 석방노력의 서투름을 매섭게 질타하는 것이 보도의 초점이 되고 말았다. 국회 내에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까지 설치되었다.

하지만 한국 신문들은 ‘외교통상부 때리기’에는 열심이었지만 그후 국정조사 특위의 활동 보도에는 흐지부지하다. 결과적으로 제3자의 시선으로 보면 그저 한국사회의 ‘자중지란 이벤트’로 변질되고 말았다. ‘적’은 바깥에 있었는데 우리는 내부만 탓하고 있었다. 언론의 비판이라는 것이 대안제시로 이어지고 사회적 통합을 지향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2004년 초에 발생한 ‘민경찬씨 펀드사기극’의 경우 신문들이 뭔가 거대 정치적 흑막이 있는 것처럼 확대 보도했으나 경찰 검찰의 연이은 수사 결과가 나오자 슬그머니 “민씨의 거짓말에 전 국민이 놀아났다”고 보도하곤 끝을 맺었다. 민씨의 자기 과시적 발언에 놀아난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바로 한국의 신문 저널리즘이다. 꼬투리만 보이면 터뜨리고 보자는 경박한 저널리즘은 언제든지 또 놀아날 수 있다. 결국 뉴스 수용자인 국민만 희롱당하는 셈이다.

한국 신문은 주도면밀한 사립탐정이 되어야 한다. 하루하루 인용보도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추적 취재하여 오래 분석한 결과를 뉴스 상품으로 내놔야 한다. 권력주변 취재원의 단순한 한마디가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확대 재생산되거나 인용형태로 주요 뉴스 취급을 받는다. ‘따옴표 저널리즘’이란 비아냥은 한시바삐 극복해야 한다.

넘쳐나는 비판..비판..

# 비판이 지면과 전파를 타고 뉴스공간에서 넘쳐난다. 이름을 내거는 논객치고 현존 권력을 비판을 하지 않으면 ‘팔불출의 펜’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권력을 비아냥대는 표현과 나무라는 자기주장이 이처럼 거대한 강물을 이룬 적도 없었다. 하지만 시원하지 않다. ‘사랑의 매’보다는 ‘증오의 칼’을 숨긴 글이 더 흔하다. 그런 글을 읽고나선 통쾌하지 않다. 대안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이미 권좌에서 아래로 내려와 있다. 집중된 권한은 분산되고 권위주의는 해체되고 있다. 아무리 비판의 북채로 ‘권력의 북’을 때려도 맹목적인 북 때리기에는 울림이 없다. 수용자들의 메아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 사회의 모든 제도적 질환과 다층적인 갈등관계의 원인을 권력의 리더십 탓으로만 돌리는 논법은 이제 싱싱하지 않다. 분석의 앵글이 돋보이지 않는다. 독재시절엔 강고한 정치권력을 타격하는 비판만으로도 큰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탈권위 시대 지식정보사회에서 비판을 위한 비판은 구태의연하고 식상하다.

수용자에게 더 친근하고 꼼꼼하게 브리핑해주는 미디어가 아니면 생존이 불투명한 다매체시대이다. 한국 언론이 미래의 위기와 도전을 먼저 검색하고 건져내보자. 팍팍한 세상 우울한 서민들에게 삶의 방법론을 자세히 일러주는 등대가 되어보자. 세계적 시야의 전망대에 서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업그레이드시켜보자. 한국의 전략적 청사진을 똑 부러지게 제시할 때 한국 저널리즘은 다시 비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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