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협회 40주년 특보.기자협회특보
# 조선반도를 처참하게 유린했던 7년 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1592년 임진년의 세월은 정초부터 흉흉했다. 소문이 떠돌았다. 길삼봉이 지리산 피아골에서 역모의 군사를 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길삼봉이 누구냐?라는 질문은 누가 길삼봉이냐?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질문의 구조가 바뀌자 길삼봉의 허깨비는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길삼봉으로 지목당한 선비 정여립과 최영경에 연루된 자들 천여 명이 형틀에 묶여 죽었다. 가족 친척이 죽었고 함께 술 마시고 음풍농월한 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자들과 그들을 두둔한 자들과 그들을 욕한 자를 욕한 자들이 모조리 끌려나와 베어지거나 으깨졌다. 시체를 묻어준 자들도 끌려와서 베어졌다.
중국 산수화를 들여다보던 임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옥에 갇힌 자들을 끌어내서 죽였다. 우의정 정철이 그 피의 국면을 주도했다. 임금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임으로써 권력의 작동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삼봉은 강력한 헛것이었다.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길삼봉은 임금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승정원, 비변사, 사간원, 사헌부에 우글거리는 조정 대신 전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길삼봉이 숨을 수 있는 깊은 숲이었을 것이다. <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 부분 발췌 >
"간첩이 군장성을 조사"
# “간첩출신이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둔갑해 군장성을 조사하는 세상이 됐다”는 통탄과 함께 한나라당 박근혜대표가 국가정체성의 붕괴위기를 문제제기 한 바 있었다. 이에 한나라당은 별안간 대통령의 국가관에 의문을 표하고 일련의 ‘국가 기본를 흔든 사태’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지난 7월말부터 8월초에 한국을 뒤흔든 이른바 ‘국가정체성 논쟁’이란 뼈대이다.
대다수 국민은 뉴스의 헤드라인엔 민감하지만 뉴스의 총체적인 맥락엔 둔감하다. “간첩이 군 장성을 조사했다”는 천인공로한 일이 벌어져선 안된다는 원칙에서 분노를 표시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의 진실인가. 여전히 21세기 한국 사회엔 참으로 희한한 낙인찍기 시스템이 작동한다.
이 논란의 주인공 김삼석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은 1993년 국가안전기획부가 이름붙인 ‘남매간첩단사건’의 당사자이다. 일본을 왕래하면서 ‘한통련’등 북한관련 관계자에게 공작금을 지원받았다는 혐의로 간첩죄로 4년간 복역했다. 하지만 1995년 당시 권영해 국가안전기획부장은 남매간첩단 사건에 개입한 프락치가 안기부의 공작원이었음을 국회정보위에 출석해 증언한다. 즉 안기부가 관제 프락치를 이용해 함정에 빠뜨려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인 것이다.
안기부 조사과정에서 김삼석씨는 구타 수면금지 성적 고문 등을 당하면서 강제 허위자백을 당하고 강제에 의한 진술서에 도장을 찍고 만다. 이런 조작적 증거에 의거 김씨는 대법원 선고대로 4년간 복역한 것이다. 하지만 1999년 그는 소정의 절차에 의해 복권된다. 즉 국가적 검증절차에 의해 간첩혐의라는 억울한 누명을 벗은 것이다. 김씨는 2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김삼석씨는 “간첩혐의로 복역한 인물이 의문사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신문 보도를 시발점으로 해 다시 간첩으로 매도된다. 국가기관 안기부 관제 공작원에 의한 함정수사로 간첩혐의를 받고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던 피해자가 국가기관 조사관이 되는 것이 과연 나라의 정체성이 붕괴하는 일이 되는가. 이 웃지도 못할 사태가 바로 우리 곁에서 벌어졌다. 김씨의 인권은 어디로 갔으며 그에 대한 명예훼손은 어디서 해갈될 수 있을까.
진실이 실종되면 ‘집단 사고 Group Think’에 매몰된 맹목적 낙인찍기가 횡행한다. 오도된 집단논리는 ‘정보 실패’를 낳는다. 자기 흑백논리에 맞추는 정보는 신빙성을 잃고 자의적으로 변질된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대사변이나 사태로 직결될 수 있음을 현시점 세계인들은 목도하고 있다.
우리 한번 솔직해보자. 한국 사회의 분석자이자 조망자인 저널리스트들이여, 기본으로 돌아가 보자. 김씨의 사례에서 언론의 기본기능인 검증기능과 분석력이 제대로 작동되었다면 이런 어이없는 파란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은 향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한국의 '자중지란' 이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