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이야기

즐거운 만화읽기(3):이토준지의 만화 <어둠의 목소리>

등록 2004.08.22 22:09수정 2004.08.2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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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시선으로 작품마다 개성 있는 공포를 선사하며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온 이토 준지의 최신 시리즈가 발표되었다.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이토준지 스페셜 호러 1편' <어둠의 목소리>이다.

a 이토준지의 만화 <어둠의 목소리>의 겉표지

이토준지의 만화 <어둠의 목소리>의 겉표지 ⓒ 시공사

작품은 각각 독립된 주제로 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단편집 형식을 취하고 있다. 총 7화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은 <어둠의 목소리>라는 제목답게 시종일관 우중충한 어둠을 담고 있다.


<어둠의 목소리>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기는 에피소드는 피와 관련한 이야기다. 즉 1화인 '피를 마시는 어둠'에서 공포를 유발하는 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피'다. 그러나 작가는 단순히 시각적인 거부감을 나타내는 '새빨간 액체'만으로 독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려 하진 않는다. 즉 피는 그의 작품에서 새로운 메타포를 가진 한 가지 대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책의 앞표지에 나타나 있는 두 가지 문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공포의 이면에는 인간의 슬픔이 숨어 있다. 공포의 이면에는 살아 있음의 신비함이 숨어 있다."

1화 '피를 마시는 어둠'에서 피는 우선적으로 인간의 애정사와 관련이 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자는, 자신이 통통하다는 이유로 실연의 아픔을 겪는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음식 먹기를 거부하고 결국 거식증에 걸리게 되는데 이 때부터 밤마다 하늘에서 피로 된 비가 오는 꿈을 꾸게 된다. 즉 작품 속에서 실연은 피와 관련된 일, 피와 관련된 공포감을 형성하는 데 시발점이 되고 있다.

그리고 '피를 마시는 어둠' 속에서 피는 생명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작품 속에서 거식증에 걸려 음식 먹기를 거부한 한 여자와 그 여자를 연모해서 자신조차 음식 먹기를 거부한 나머지 심하게 야위어 가는 한 남자가 등장하는 것. 그러나 사실 남자는 음식을 먹지 않아서 야윈 것이 아니라, 밤마다 자신의 피를 여자가 잠든 사이, 여자에게 먹였기 때문에 야윈 것이다. 즉, 남자는 피를 통해서 음식을 먹지 않아 죽을지도 모르는 여자를 살리고 싶은 것이었다.

이처럼 작품 속에서 피는 생명과 관련되는 한 가지 은유로 작용하고 있는 것인데 작가는 이를 섬뜩한 공포의 맥락으로 구연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러한 설정은 작품 말미에 남자가 죽게 되었을 때 흡혈박쥐들이 여자의 피를 뽑아서 남자를 소생시키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1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나머지 화(話)에서도 인간내면에 존재하는 슬픔, 기묘한 생명력과 연관된 영혼, 환영, 미스터리 서커스, 혐오 섞인 더러움(기름), 자의식에 의한 인과응보, 강력한 죄의식 등의 소재가 등장하여 독자로 하여금 공포를 유발하는 직, 간접적인 요인이 된다.

어둠의 목소리에 나타난 변함없는 이토준지의 언어


이토준지는 만화가 중에서도 비교적 자신의 색채를 바꾸지도, 잃지도 않는 안정감을 유지할 줄 아는 만화가다. 여러 작가의 만화를 보다보면, 만화의 그림체가 바뀌었다든가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졌다든가 하는 미묘한 느낌을 받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러한 원인은 작가가 자신의 그림체를 달리 했을 수도 있고, 작가 본인이 아닌 다른 작가가 대신 그 작품을 잠시 맡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하튼 그 경우 한 가지 만화를 계속 보던 독자 입장에서는 일련의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는데 이는 한 작가와 관련된 신뢰의 문제일 수도 있고 기량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토 준지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변함없이 자신만의 그림체를 가지고 개성 있는 이야기로 작품을 채워가기 때문에 꽤 성실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사실 그가 예전에 발표했던 '이토준지 공포 만화 시리즈'와 최근에 발표된 시리즈인 '이토준지 스페셜 호러' 시리즈의 작품들은 그 격차가 십수 권이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준지의 처음 작품과 최신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의 특성들은 비교적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그만의 특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극과 극을 오가는 명확한 대비성이 아닐까 싶다. 우선적으로 그의 만화에서 지적할 수 있는 대비성은 인물군상에 관한 대비성이다. 이토준지는 그의 만화 속에서 기괴하고 끔찍하며 징그러운 대상을 많이 등장시켰다. 기괴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소이치의 즐거운 일기', '소이치의 저주의 일기' 최근작 '어둠의 목소리' 4화에 등장한 못을 입에 물고 있는 소이치다.

a 그의 작품 속에서 기괴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소이치

그의 작품 속에서 기괴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소이치 ⓒ 시공사

끔찍하고 징그러운 대상의 예로는 소용돌이 시리즈에서 자주 등장했던 달팽이 인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토준지의 만화 속에서 이들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의 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미인 형, 미남 형이 아주 많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토준지 공포 만화' 시리즈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토미에를 들 수 있고, 세련되고 깔끔한 이른바 미소년풍의 남자 주인공도 셀 수 없이 등장했다.

이토준지는 이렇듯이 쳐다보기 조차 싫은 인물들과 미인 형 인물들을 동시에 등장시켰다.

극과 극인 것은 작품을 이끌어 나가는 이야기에도 해당된다. 그의 만화는 '공포·호러'라는 장르로 쉽게 구분되곤 한다. 그러나 가끔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무섭다는 생각보다 '작가가 왜 이리 짓궂게 만화를 그려내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즉 가끔 공포와 대비되는 재치와 넌센스에 가까운 작가의 짓궂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팽배한 어둠을 가끔 환기하게 만들어 그만의 작품을 보고 있다는 만족감과 더불어 일련의 유쾌함마저 느끼게 한다.

극과 극이라는 이토준지 작품의 특성은 최근작인 '어둠의 목소리'에서도 잘 드러난다. 5화 글리세리드에서 기름을 마시는 오빠와 여동생이 등장하는데, 더럽고 징그러운 오빠에 대비하여 여동생은 미인으로 나온다.

4화 도깨비집의 비밀에서는 두 친구가 폐가를 개조한 도깨비 집을 방문한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도깨비 집에서 둘 중 한 명이 끔찍하게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작품 말미에서는 유머스럽게도 장성한 소이치가 무시무시한 그의 부인에게 잡혀가는 장면도 나온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야기

이토준지가 그동안 만들어 온 공포 만화를 보면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수많은 공포물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전형적인 형태의 귀신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영혼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오지만 그의 작품은 맥락상 인간과 관련된 공포만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주제화 했던 공포는 주로 인간의 광기, 집착, 어리석음을 과장하거나 이리 저리 비틀어서 기형화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시종일관 인간과 관련된 공포를 주장해온 그의 만화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도 아니고, 미지의 존재도 아닌 바로 우리 옆에 있는 '사람' 그 자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수많은 사람들을 가책 없이 살해한 살인마는 마치 그의 작품에 등장했던 수많은 왜곡된 인간군상의 다름 아니다.

진정 사람이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밤중에 동네 골목길을 마음먹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사람이 무서워서다. 이런 세상에서 항상 인간으로부터 공포의 주제를 찾아온 그의 만화는 더욱 무섭게 다가온다.

어둠의 소리

이든 필포츠 지음, 박기반 옮김,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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