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름 키퍼, <영리한 소녀들>(1996)곽동운
그런데 여기 동질성의 강요를 덜 받는 전시회가 하나 있네. 물론 난해한 작품들이 있기는 하지만 여타 전시회들에서 밟는 단계들이 몇 개로 줄어들었으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
그 전시회에 걸린 작품들은 내 자신과 거의 완벽할 정도로 코드가 일치하더군. 바로 <평화선언 2004 세계 100인 미술가>(이하 평화선언) 전시회가 그것이라네.
물론 내 자신 속에서 꿈틀거리는 평화의 의미와 해당 작품이 담지하고 있는 평화가 꼭 동등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평화선언 몇몇 작품들도 내게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더군. 나와 작가가 느끼는 평화를 바라보는 시각차이라고 정리하는 게 좋을 듯싶네.
사실 평화선언은 7월 31일부터 전시되었더군. 이번 달 15일에 다녀왔으니, 나도 무척 늦게 다녀온 셈이지. 뒷이야기를 보려고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를 검색해보니,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10월 24일까지 2주간 연장 전시를 한다더군.
평화선언은 크게 3분야로 전시를 해. 1번 테마는 전쟁의 잔혹성, 2번 테마는 우리 민족이 처한 분단의 고통, 일상적 폭력과 억압을 다루었고, 3번 테마는 평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다고 안내를 하더군.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1, 2, 3의 큰 차이는 없어 보였어. 아니, 이 코너에서 저 코너로 발걸음은 옮기고 있었지만, 작품에서 전달하는 메시지와 감흥은 하나였지. '전쟁반대! 우리에게 평화를!' 'No War! We want Peace!' 자네도 똑같았을 감정이었을 걸.
보도에 의하면 평화선언은 약 1년여간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더군. 국내 작가들은 둘째치고 53명의 해외작가들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란 쉽지 않은 일이겠지. 어쩌면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사람들은 한 가지 교훈을 얻었을 거라 생각하네.
평화의 힘을 모으는 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이 축나는 일이지만 그만큼 복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수많은 관람객들이 다녀가고 언론매체에서도 호평을 쏟아냈고, 결국 연장 전시까지 하게 됐으니 말이야.
앞에서 말했듯이 평화선언에 전시된 160여점의 작품들 모두가 내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서 내 정신을 순간 멍하게 할 정도로 느낌이 확 다가오는 몇 몇 작품이 있었네.
그 중 하나가 설치미술가 임옥상의 <철의 꿈>(2001)이었다네. 매향리 사격장에서 주워 모은 불발탄에 숟가락과 포크를 엮어 독수리의 형상을 만들어낸 임옥상의 빼어난 작품성이 돋보였어.
그 불발탄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인살상용 클러스터 폭탄과 대전차용 폭탄이었어. 죽음과 파괴로 그 쓰임새가 명확한 물건들을 가지고 비상하는 독수리의 형상을 나타냈다는 게 정말 기막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