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앞에 있네'

이오덕 지음 <우리말 살려쓰기 (둘)>

등록 2004.10.22 11:02수정 2004.10.2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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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님 무덤 앞  '새와 산' 시비.  새 한 마리 하늘을 간다 / 저쪽 산이 어서 오라고 부른다 / 어머니 품에 안기려는 아기 같이 /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날아가는구나!
이오덕 선생님 무덤 앞 '새와 산' 시비. 새 한 마리 하늘을 간다 / 저쪽 산이 어서 오라고 부른다 / 어머니 품에 안기려는 아기 같이 /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날아가는구나!박도

만나는 사람에 따라 삶의 길이 달라지다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 이황 <도산십이곡> 중 구곡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그 만나는 사람에 따라 삶의 길이 달라지는 경우가 흔하다. 예수나 부처와 같은 성인을 만나 평생 성직자로 보내는 이도 있고, 사상가나 학자를 만난 정치인이나 학자의 길로 평생을 보내는 이도 많다.

그와 반대로 잘못된 만남으로 교도소로 가거나 범죄의 소굴에서 평생 동안 헤어나지 못하는 이도 많다.

나는 사람 복이 많아 살아오면서 좋은 분을 많이 만났다. 쉰이 넘어서 만나 뵌 이오덕 선생님은 말씀 가운데, 말씀이 없는 몸으로 보이신 가르침으로, 많이 깨우쳐 주셨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눈과 글쓰기, 그리고 어린이와 자연에 대한 사랑이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당신은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함이 몸에 밴 분이셨다.


선생님은 늘 못 배운 사람,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어린이 편에서 세상을 보시고, 생각하시면서 그들을 위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다. 두 쪽이 난 나라를 안타까워하시면서 통일된 나라를 바라며 사셨고, 가난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 사람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세상을 나무라셨다.

특히 글쓰기에 있어서 배운 사람일수록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 외국어를 많이 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며 글은 쉬울수록 좋은 글이라는 것을 몸소 행동에 옮기셨다. 그래서 선생님이 남기신 많은 글에는 어려운 말이 거의 없다.


한번은 내가 쓴 글을 보시면서 "박 선생, '그녀'라는 말은 그 사람, 또는 '그이', '그'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왜 여자에게만 '그녀'라고 합니까? 그렇다면 남자인 경우에는 '그남'으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하신 말씀이 옳아서 그 뒤부터 '그녀'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사람되는 공부 세 가지

다음 글은 선생님께서 언젠가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돌아가시던 해 이른 봄 무너미 마을 글방 앞에서
돌아가시던 해 이른 봄 무너미 마을 글방 앞에서박도
지금까지 내가 말한 사람되는 공부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세 가지 삶의 체험 -일과 자연과 가난- 이것을 오늘날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른들한테야 묻지도 않겠다. 자라나는 사람들의 생각이야말로 중요하니까. "흥, 그런 교육관은 옛날 사람들이 가졌던 것이지. 21세기 이 과학 시대에 어디 그런 관점이 가당이나 한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물론 많을 것이다.

정치가 그렇고, 사회의 틀이 그렇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풍조가 그렇고, 무엇보다도 학교 교육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이대로 가면 바로 낭떠러지다. 우리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인류가 머지않아 반드시 망한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지만 사람들이 마치 죽음의 바다로 달려가는 수만 마리 쥐 떼처럼 미쳐서 뛰어가고 있는 그 앞길이 너무나 훤하게 보인다.

그래서 어른들과는 그래도 좀 다른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어 본다. 아이들은 열에 한 사람쯤, 아니면 스물에 한 사람쯤은 내 말에 공감하고 찬성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가령 백에 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바로 보고 옳게 살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역사는 언제나 깨어난, 이런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앞장서 이끌어 왔으니까.

다시 한번 짚어 보지만, 오늘날 우리 교육에는 일과 자연과 가난이 완전히 없어졌다. 세 가지 가운데 그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참된 사람 교육은 될 수 없는데, 이 세 가지가 죄다 없으니 무슨 교육이 되겠는가?

지금의 교육은 이 세 가지를 싹 쓸어 없앤 자리에 살벌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우고 그 속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는 책만 읽고 쓰고 외우고 아귀다툼을 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무슨 수로 아이들이 그 목숨을 지키고 가꾸어 가겠는가.

우리 학생들, 청소년들은 세상을 바른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뭔가 아주 크게 잘못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사람의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책 겉 그림
책 겉 그림아리랑나라
2003년 8월 25일, 충북 충주시 무너미 마을에서 이오덕 선생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가셨다.

선생은 가셨지만 아드님 정우씨가 선생의 1주기가 되는 지난 8월 25일에 <우리말 살려쓰기> '하나'에 이어 지난 10월 15일 '둘'을 펴내어 잉크 냄새도 지워지지 않은 책을 나에게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마치 지난날 선생이 보내준 것처럼 반갑고 고마웠다.

책을 펴자 마치 선생님이 생전에 말씀하시듯 이런 저런 말씀이 다 들어있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말썽꾼 제자임을 깨닫게 한다.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늘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글을 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선생님의 경지에는 도저히 이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나는 이미 생각이 굳어진 나이에 선생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내가 살아온 것만큼의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어서 선생님은 가셨지만 다행히 그 말씀은 그대로 남아서 계속 책으로 나옴에 감사드린다. 선생님이 하신 숱한 말씀을 이 기사에 다 옮길 수는 없다.

이 책은 어떤 글이라도 글을 쓰는 사람, 말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 교과서로 삼아야 하는 우리말의 지침서요, 등대다.

1, 2권 차례를 살펴보면 '사람을 살리는 글쓰기', '깨끗한 글쓰기', '우리말 이야기', '시 쓰기', '우리 말 우리 글을 쓰는 사람들', '한자말을 쓰지 말아야 하는 까닭', '우리 말을 살려쓰려는 뜻' 따위로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이 그대로 담겨 있다.

스승은 가셨지만 녀던 길(남기신 그 말씀) 두고두고 삼가 무릎꿇고 펼쳐봐야겠다.

우리 말 살려쓰기 하나 - 사람을 살리는 글쓰기

이오덕 지음,
아리랑나라,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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