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배미 계단 밟고 하늘을 향한다

[이철영의 전라도 기행 36] 구례 피아골 다랑논

등록 2004.11.10 01:34수정 2004.11.1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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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피아골 다랭이논 ⓒ 오창석

옛날에 어느 농부가 자기 논의 수를 세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한 배미가 모자랐다. 해가 지도록 세어 보고 또 셈해 보다가 결국은 포기했다.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벗어 놓았던 삿갓을 집어들었다. 그 아래에 손바닥만한 논이 숨어 있었다. 그것을 ‘삿갓배미’라 불렀다. 삿갓이 덮어버릴 만큼 작은 땅이란 얘긴데 그냥 재미로 지어낸 이야기만은 아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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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입구부터 해발 700m 지대까지 다랑논이 층층이 조성되어 있다. ⓒ 오창석

지리산 자락에 안겨 있는 구례 피아골 계곡을 따라 오르면 그 같은 땅뙈기들을 수 없이 만난다. 누가 그런 심산유곡의 산비탈에 농토를 만들었을지 궁금하기만 한데 아쉽게도 역사에서 그들의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기록자들의 눈을 벗어난 사람들이다.

어쩌면 당대의 현실에서 패배하고 역사 속에서 스스로 잊혀지기를 원했던 이들일지도 모른다.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은 그들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리산) 골짜기에는 예로부터 평지에서 볕 바르게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다. 역모에 연루되어 멸족의 화를 당하게 생긴 사람, 민란에 가담하여 모가지가 위태로운 사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병란 때 마누라가 겁간을 당하여 얼굴 들고는 살 수 없게 생긴 사람, 남의 여편네나 친척 혹은 상전의 딸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한 사람, 환자나 빚에 살림이 거덜이 난 사람, 지겨운 종살이에서 제 세상을 찾아 퉁긴 노비 등등,

하여간 이런저런 일로 남의 눈을 크게 기어야 할 사람들이 밤봇짐을 싸 짊어지고 몰려들던 것인데, 이 산은 어머니처럼, 세속의 구지레한 온갖 허물을 가리지 않고 그런 사람을 골짜기 골짜기마다 너그럽게 싸안아 깊이깊이 감추어 주었다.


골짜기의 구비마다에 어김없이 펼쳐진 논배미들은 보는 방향에 따라 흡사 인절미를 겹쳐 놓은 듯도 하고 바나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아래서 올려다 볼 양이면 시루떡의 단면 같기도 하고,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웅대한 성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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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 일주문 ⓒ 오창석

그 모든 다랑이논들은 계단 계단을 돌로 쌓아 올린 석축에 의지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거의 모두가 지면에서 수직으로 솟아 있다. 토목공사의 기본이 무시돼도 한참 무시된 위험한 구조물이다.

그곳에 있는 ‘연곡사’가 신라시대의 절이니 그 연대에 비추어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천년을 넘겨 지탱해 왔을 이 불가사의한 구조물들은 오로지 인체의 노동으로만 건설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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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논 ⓒ 오창석

또 어떤 석축들은 수직마저 거역하여 숫제 허공에 땅을 띄워 놓았으니 이를 ‘공중배미’라고 부른다. 아니 ‘눈물배미’가 옳다. 한 뼘의 땅, 한 톨의 쌀, 한 그릇의 밥이 목숨을 기르는 고통스런 명령 앞에 그들은 장구한 세월의 묵묵한 노동으로 답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그 아들에서 손자로 이어졌을 이 숭고한 노동은 계곡 입구부터 해발 700m 기슭까지 골짜기 곳곳을 ‘옥답’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이가 하나 태어나 입 하나 늘면 기쁨과 함께 탄식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 애를 어찌 멕인다냐” 돌덩이를 옮기며 손은 뭉개지고 땀으로 뒤범벅된 등허리가 수백 번 꺾여도, 내 자식들에게는 더 좋은 세상이 오리라는 미련한 믿음이 아침이면 무너진 몸뚱이를 다시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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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다랑논에서 벼를 베고 있는 김판문 노인. ⓒ 오창석

논에서 부인과 함께 벼베기를 하고 있던 김판문(71) 할아버지를 만났다.

“암, 여그서 태어나서 살았제, 웃대 조상님들 선영도 여가 있는디 여그서 죽을 것이여. 결혼함서도 아부지한테 땅 한 마지기도 못 받았어. 노가대 한 십년 해서 여그 논 다섯 마지기 샀제. 요 논 부쳐 묵은 지가 한 삼십년 넘었구만.”

'공중배미'를 확인하기 위해 “여기 논 끝이 공중에 떠 있는 것 아닌가요?” 여러 번 물었다. 그 때마다 귀찮은 듯 아니라고 대답하다가 나중에는 꼭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마냥,

“아 이 사람아 다 똑같어, 쪼끔이라도 더 넓힐라고 그란 것이제.”

마지못해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러면서 구석의 큰 바위 옆에서 햇볕도 못 받는 작은 논배미를 놓고는,

“저것은 산 것이 아니여, 내가 돌 굴리고 흙 날라서 맨든 것이여” 하고 대여섯 번은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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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다랑논을 의지해서 살아 온 김판문씨의 얼기설기 지어진 집 ⓒ 오창석

그런데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고령화에다가 경운기 하나 들어서지 못하는 이 곳의 특성상 많은 논들에는 차나무, 밤나무 등 유실수가 심어져 있었다. 얼마 전 문화재청은 남해군 가천마을의 다랑논을 ‘문화유산’으로 지정예고 했다는데 피아골의 다랑논 또한 더 늦기 전에 역사성과 존재가치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올해는 유난히도 벼들이 잘 여물어 어느 논이나 샛노란 콩고물을 흩뿌려 놓은 듯 한데, 그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밥이 해결되는 세상, 천국으로 가는 계단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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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연재했던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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