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제발 전화 좀 받으세요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37)

등록 2004.11.30 09:40수정 2004.11.3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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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오늘도 우리 어머니와의 휴대폰 통화는 어김없이 실패로 끝났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전화를 받지 않으실까? 전화기를 놓고 나가셨나, 아니면 또 벨소리를 듣지 못하신 걸까?"

분명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거라 생각하면 약간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워낙 연세가 많은 분이다보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든다.

어머니와 휴대폰의 지루한 동거도 이제 제법 세월이 흘러 7개월. 7개월 전 어느 날, 퇴근 후 나는 어머니 앞에 조그만 포장을 내밀며 말했다.

"참, 우리 어머니는 유행에 둔감하셔.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녀들에게 휴대폰 사놓으라고 한다는데 말이에요. 휴대폰 가지고 다니고 싶지 않으세요?"

"나 참, 집에 전화가 놀고 있는데 늙은이가 휴대폰이 뭣에 필요하냐?"


"아니 더 이상은 엄마보다 내가 불편해서 못살겠어요. 그래서 샀으니 이거 외출할 때 꼭 가지고 다니세요."

그런 다음 휴대폰 포장을 뜯고 필요한 세팅을 한 후 한참동안 어머니에게 전화 거는 법, 전화 받는 법에 대해 간단하게 알려드렸다.


그리고 혹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휴대폰에 목걸이 줄을 장착한 다음 외출할 때 꼭 가지고 다니실 것을 신신당부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뒤늦게 휴대폰을 선물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휴대폰을 우리 어머니만 없으면 섭섭해 하실 것 같아서가 그 첫 번째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어머니가 어쩌다 외출하셨을 때 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 어디에서나 연락할 수 있고, 혹시라도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머니가 아닌 외부인이 곧바로 나나 오빠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두 번째 이유가 훨씬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휴대폰에 다른 번호는 저장하지 않고 오로지 아들, 딸 전화번호와 휴대폰 번호만 저장해서 어머니에게 선물했다.

처음 휴대폰을 받으신 어머니는 말로는 쓸데없이 돈 썼다고 야단을 치시지만 정작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은 눈치였다.

그런데 일단 어머니에게 휴대폰을 선물하긴 했으나 문제는 그 이후 정작 몇 개월이 흐르는 동안 시험통화가 아닌 내가 실제로 어머니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을 때 통화가 성공한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어머니의 휴대폰 번호를 누르면 언제나 "지금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메시지만 허무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러니 더욱 궁금할 수밖에…. 퇴근 후 집에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휴대폰을 받지 않으신 이유를 물으면 우리 어머니 말씀은 늘 이랬다.

"아 참, 깜빡 잊어버리고 가지고 나가지 않았구나"거나 "배터리 충전하는 걸 깜빡 잊었구나"이었다.

앞의 두 가지 대답은 그런대로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러신 거겠지"하고 이해가 가지만 정작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건 어머니의 이런 대답이었다.

"네가 언제 나에게 전화를 했다고 그래. 오늘은 하루 종일 휴대폰 가지고 다녔는데 무겁기만 하고 전화 한 통화도 없더구만…."

그러면 어김없이 나는 어머니의 휴대폰 액정에 찍힌 "부재전화 몇 통" 메시지를 보여드리게 되고 그러면 어머니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전화 벨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그리고 애꿎은 전화벨소리 탓을 하시기 시작했다.

"이 전화 벨소리가 문제야. 그러니 알아듣기 힘든 음악소리 말고 듣기 쉬운 옛날 전화벨소리로 지정해달라니까 그러는구나."

하긴 젊은 사람들도 가방 속에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다보면 어떤 때는 휴대폰 벨소리가 다른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 때가 많은데 하물며 칠순 노인에게 익숙하지 않는 휴대폰 음악소리를 선별하라고 하는 건 무리이겠다 싶어서 보다 식별 가능한 전화벨소리를 찾아 휴대폰에 저장된 메모리들을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전 휴대폰과는 달리 휴대폰에 저장된 메모리 중에 다양한 음악들은 많지만 정작 오리지널 전화벨소리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다양한 음악 벨소리가 넘쳐 나다보니 정작 오리지널 전화벨소리는 설 자리를 잃어버린 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전화벨소리를 유료로 다운받기도 좀 그렇고 해서 결국 지금 저장해놓은 벨소리 중에 그래도 어머니가 식별 가능한 벨소리를 찾기 위해 이것저것 들려드린 후 고른 벨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꽤 오래 전에 유행했던 깜찍한 아이 목소리의 "전화 받으세요"였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만큼은 잘 들리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 전화벨소리로 설정해 놓은 후 몇 번 시험통화를 해보면 잘 받으시는 것 같아 안심하고 그 후부터 전화벨소리 문제는 잊어버렸다.

그런데 최근 외출하신 어머니에게 급히 통화하기 위해 어머니 휴대폰 통화를 수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그 때마다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메시지만 반복될 뿐이었다. 결국 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걱정하다가 퇴근 후 통화가 안 된 이유를 다시 물어보았다.

"어머니, 오늘 휴대폰 가지고 나가지 않으셨어요?"
" 아니, 가방 속에 꼭꼭 가지고 다녔는데."
"그런데 아까 전화통화가 안되던데요"
"무슨 소리야 전화벨소리가 울리지 않았는데"
" 그럼 배터리가 충전 안 되었나 보네."
"충전이 안 되긴, 내가 아침에 나갈 때 충전됐는지 확인했는데 그럴 리가, 이 봐라 충전표시는 가득 되어 있잖니."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나에게 건네는 어머니의 휴대폰 액정을 흘낏 보니 아니나 다를까 부재전화표시가 선명하게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에이. 또 전화벨 소리를 못 들으셨나보네. 여기 보세요. 여기 부재전화 표시가 나와 있잖아요?"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하는 소리가 안들렸다구."

느닷없이 웬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인가 하는 생각에 멈칫하다보니 문득 예전 벨소리를 "전화 받으세요"로 설정했던 기억이 났다. 전화벨소리에 할머니 소리는 들어 있지 않은데도 우리 어머니는 그 전화벨 소리를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로 인식하고 계신 것이었다. 하도 강한 부정을 하시는 게 이상해서 어머니 휴대폰에 설정된 전화벨소리를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 말씀대로 어머니 휴대폰에 설정되어 있던 벨소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화 받으세요"가 아닌 왈츠 곡으로 변해 있었다. 그동안 당신의 휴대폰 벨소리가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라고 굳게 믿으신 어머니에게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왈츠곡이 흘러나오니 당연히 못 알아들을 수밖에.

"거 봐라,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 소리가 안 들리니 내가 들을 수 있냐?"
"그러게 말이에요. 이게 왜 또 이상한 벨소리로 설정되었나,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
"다시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로 해놓아라. 그게 제일 듣기 쉽더라."
"넷! 잘 알겠습니다."

그 후부터 우리 어머니의 휴대폰 벨소리는 누가 뭐래도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로 고정되어 버렸고, 다시 전화벨소리를 설정한 이후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통화가 어렵긴 하지만 가끔씩은 어머니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은 많이 진전되었다.

이쯤 해서 어머니와 휴대폰 이야기는 끝이 났다. 물론 아직까지도 어머니와 휴대폰과의 아슬아슬한 동거이야기는 계속 진행 중이지만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왠지 내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휴대폰이 없었을 때 어머니는 비록 아들, 딸이 불편한 점은 좀 있더라도 그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셨다. 집에 계시고 싶으면 계시고 외출하고 싶으면 아무 때나 외출할 수 있었는데 그 휴대폰이 생긴 이후부터는 외출 시에도 늘 휴대폰을 챙겨야 하고 휴대폰 배터리 충전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번거로운 일들이 새롭게 생긴 것이 아닌가? 뒤늦은 시집살이라고, 까다로운 시어머니가 따로 없을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미처 생각지도 못한 속박과 구속은 물론이고 다루기 힘든 물건에 대한 스트레스까지 받고 계시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얼마나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면 "전화 받으세요"가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로 들릴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냥 마음 편하게 사시라고 휴대전화고 뭐고 그냥 다시 해지시켜 버릴까 하는 생각이 불끈 들었다. 그렇지만 연락도구 없이 당신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에 어머니에게 짐이 되는 휴대폰을 없애버릴 수 없는 내 심정은 더욱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평상시 인터넷도 하실 줄 알고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도 찍을 줄 아는 분이니 세월이 좀더 지나고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친 다음에는 당신이 영 정이 가지 않는 조그만 휴대폰과도 반드시 친해질 수 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 때가 올 때까지 나는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기다릴 작정이다.

비록 전화통화가 되는 때보다 안 되는 때가 더 많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되는 날이 더 많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말이다.

짐작하건대 전화 벨 소리에 더 이상 '할머니'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 그날이야말로 바로 우리 어머니와 작은 휴대폰이 서로 친해지는 그날이 아닐까? 그때가 되면 우리 어머니에게도 전화벨소리가 "할머니 전화 받으세요"가 아닌 "전화 받으세요"로 정확히 들릴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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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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